(3) 지리도참
조선 초기부터 창업주인 태조 이성계의 한양천도에 따른 풍수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민간에서도 자연 지리도참에 대한 미신이 성행하게 되었고 讖緯術數에 관한 책들이 마구 만들어져 퍼져나갔다. 태종 때에 참위서에 대한 금령이 내렸고 세조 때에는 書目까지 열거한 민간의 圖讖秘記 收去令이 내렸다. 성종 때에는 수거령의 대상이 되었던 도참비기는 이미 남김없이 거둬들였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어, 제시한 서목 이외의 도참비기가 있으면 찾아내어 올려 보내라고 하였다. 이렇게 민간 소장의 참위서를 찾아내어 회수한 것은 민간에 만연하는 미신을 근절시키자는 의도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易姓變革 같은 일이 혹시라도 그러한 지리도참에 의해 또는 그런 것들에 빙자하여 발생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심산에서 나왔을 것이다.
조선 중기에는 南師古·魏漢祚 등이 도참비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도참비기는 예언으로, 신빙성을 띠는 것을 그 특색으로 들 수 있다. 世運의 향방이나 시국의 추세는 사실상 명확히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도참비기 등의 수단을 빌어 그런 일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남사고는 중종과 명종대에 걸쳐 異人으로 알려졌던 불우한 지식인이다. 그는 향시에는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해 별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만년에는 현감도 지내고 천문교수로 서울에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남사고의 예언은 당시의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이어서 많은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일례를 들면 중종의 繼妃 文定王后가 자기의 소생인 명종을 왕위에 앉혀놓고 자의로 국정을 움직여서 많은 폐단을 자아내며 건강한 몸으로 있을 때, 남사고는 문정왕후가 쉬 죽을 것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동서분당으로 당쟁이 일어날 일이라든지 왜구의 대거 침략이 일어나리라는 것 등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이런 예언은 術數라기 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정세에 대한 예리한 판단에 입각한 일종의 예측에서 나온 성질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사고는 그런한 일들로 해서 이인으로 지목되었고, 그의 문하에서는 수련적인 도교를 신봉하는 인물이 여럿 나왔다. 鄭碏·楊士彦·洪裕孫 등은 남사고의 문생들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위한조는 앞에서도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지만, 청학산인으로도 불렸는데, 異術을 배우고 여러 나라의 道觀과 산림을 주유하고 돌아와 청학동에 살면서 많은 도인들의 사사를 받았다. 위한조도 역시 대륙을 내왕하면서 국내외 정세의 추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土亭秘訣≫의 저자로 알려진 李之菡도 위한조의 제자로 전해진다. 이러한 부류의 인물들은 정치에 종사할 기회를 갖지 못해 그들의 시국에 대한 정세판단을 국정에 반영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車柱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