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어선
어업의 발달은 어업의 주요한 생산수단인 어선수의 증가와 대형화를 초래하였다. 18세기의 선박수에 관한 전국적인 통계는 보이지 않으나 일부 도의 통계는 있다. 영조 26년(1750) 대장에 올라 있는 충청도의 배는 848척이었다.0587) 정조 16년(1792) 경상도의 대장에 올라 있는 과세 대상 배는 6,163척이었고, 황해도에는 실제로 1,113척의 배가 있었다.0588) 이들 중 약 절반을 어선(운반선 포함)이라고 보면 전국 어선의 총수는 1만 척 정도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0589)
≪균역사목≫에는 선박의 등급과 세액이 비교적 상세히 규정되어 있고 각 도의 선박의 대소는 배 길이의 把수를 기준으로 하여 정하였다. 이 사목에 의거하여 각 도의 선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경기도와 황해도의 선척은 5등급으로 나누어 과세하였는데 제일 큰 대선은 길이가 6파 이상, 제일 작은 小小艇은 1파 반 이하였다. 1파는 약 1.5m이었으므로 길이가 9m 이상으로부터 2.25m 이하의 것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작아 말구유처럼 생긴 소형선으로서 등급에 들지 않는 槽船과 다름없는 것도 있었다. 경기도와 황해도에는 돛대가 2개 있는 ‘唐道里船’이라는 배가 있었는데 이것은 해양에 출입하여 漁利가 많다고 하여 대선, 중선, 소선으로 나누어 세금을 매겼다.
충청도의 선척은 11등급으로 나누어 8파 이상은 1등, 2파 반은 小小船이라고 하였다. 어전 어업 전용어선인 看水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경세유표≫에서는 이를 썰물 때 임통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 배라고 하였다. 廣船이라고 하여 바다에는 나가지 못하는 배도 있었다.
전라도에서는 6파 반 이상은 대선, 2파 이하는 소소선이었다.
경상도에는 木三船, 桶船, 櫓船, 광선, 漁艇 등이 있었다. 木三은 舷을 말하므로 삼선은 보통의 배이다. 삼선으로서 2파 반 이하의 작은 것은 해안에서 미역이나 조개를 채취하는 데 불과하였다. 통선은 현이 없는 배였고, 노선은 강과 바다가 교차하는 곳을 왕래하는 배였다. 광선은 강에만 있는 배로, 16파 이상을 대광선이라 하였고, 3파 이하를 소소광선이라 하였다. 강을 왕래하는 배는 바다를 왕래하는 배보다 길이가 길었다. 어정은 일엽 편주의 소형 어선이었다.
함경도에는 삼선, 亇尙船 및 耳船이 있었고, 강원도에는 水上船이 있었다. 마상선은 매생이었고 수상선은≪경세유표≫에서 洌水의 배라고 하였다. 이선은 어떤 배인지 알 수 없다.
어선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오페르트(Ernst Oppert)가 그의 저서에서 언급한 1860년대의 어선은 당시의 어선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서해안을 왕래하면서 본 어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의 어선은 중국의 그것보다는 도리어 일본 것과 더 비등한 것이었으나 그 만든 솜씨는 조잡하였다. 밖의 판장은 나무못으로 서로 짜여져 있고 짜서 만든 자리로 돛을 삼았다. 대단히 깊기는 하나 甲板이 없고 하나씩 떨어져서 옆으로 놓여 있는 배들뿐이었으며, 선실에는 덮는 것이 전연 없고 잡은 물고기는 그 안에 그대로 던져진다. 배는 어느 것이나 30 내지 40명이 탈 수 있음직하게 보였으나 뒤에는 60명이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Ernst Oppert, 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Korea, Leipzig, 1880;한우근 역,≪금단의 나라 조선기행≫, 문교부, 1959, 172쪽).
또 오페르트는 한강 강구에서 꽤 많은 어선들이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배 중의 여럿을 가 보았는데, 이들 배는 모두 각각 30∼90명의 선원을 태우고 있었고 배에는 갑판은 없으나 그 대신 고정되지 않은 널 쪽이 가득 차 있어 잡힌 고기가 그 속에 들어 있었다고 하였다.0590)
서양인이 서양의 기준으로 본 당시의 어선은 보잘것없었지만 비교적 규모가 큰 어선이 서해안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어선의 구조는 취약하였다. 그것은 당시의 우리 나라 조선 기술의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어업이 견고하고 성능이 뛰어난 대형 어선에 대한 의존도가 적었던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이 때의 어업은 해면 어업에서도 육지에서 가까운 연안의 범위 안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구·어법도 어군의 내유를 기다려서 이를 잡는 수동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는 수산 자원이 극히 풍부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어구·어법으로도 수산물의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어선은 이러한 어업에 적합한 것을 건조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0587) | ≪均役行覽≫御使 韓光肇書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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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8) | ≪正祖實錄≫권 36, 정조 16년 12월 무자. |
0589) | 1911년의 한국인의 어선 총척수는 10,081척이었고, 수산물 제조·운반·판매용 선박은 1,019척이었는데, 이중 경상남북도는 전자가 3,513척, 후자가 133척, 합계 3,646척이었던 것을 감안함(朝鮮總督府,≪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1, 190·191쪽). |
0590) | Ernst Oppert, 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Korea, Leipzig, 1880(한우근 역,≪금단의 나라 조선기행≫, 문교부, 1959, 22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