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수도권에서의 유통
당시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한 부근 일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고0627) 생활수준도 다른 지역보다는 높았으므로 부식품에 대한 요구가 커 魚鹽의 유통을 촉진시켰다. 그 결과 소금에 대한 수요도 증대되어 그 유통량은 매우 많았다.
수도권에서의 소금유통 상황을 보면 처음에는 六矣廛을 비롯한 市廛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중 국역을 부담하는 京鹽廛이 소금유통의 중심을 이루고 麻浦鹽廛과 鹽水廛·南門外鹽廛 등이 유통을 분담하였다.
이들 소금 상점들은 대체로 정부의 일정한 보호를 받으면서 그들의 이익추구에 몰두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저항을 받았다. 그 가운데 어물전을 비롯한 염전 상인들이 乾鹽魚를 뱃사람들로부터 헐값으로 사들인 뒤, 이것을 다시 한양 백성들에게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킨 것은 그 하나의 두드러진 사례이다.0628)
시대의 변화를 의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정부의 보호 아래 기득권만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전계통의 염전들은 이제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이와 같은 분위기를 재빨리 포착하고 능동적으로 상술을 개발한 私商들이 수도권에서 어염유통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배를 타고 상품생산지에 직접 가서 대량으로 구입함으로써 한양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에서 어염 등의 시세까지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0629)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이익을 추구하는 풍조를 만연시켜 남산 봉수대에 근무하는 烽燧軍조차도 그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소금 생산지에 출입하면서 수도권 소금유통에 가담하고 있었다.
십여 년 전부터 목멱산(남산) 봉수군 너댓 명이 작은 배를 준비한 뒤 소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그 봉수군들은 그 후 마음대로 소금을 싣고 와서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취합니다. 그들은 소금판매 이익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는 다투어 큰 배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수십 척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배를 타고 소금 제조장에 베틀의 북과 같이 드나들면서 이익 취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市弊≫권 3, 奎章閣圖書 15085, 麻浦鹽田).
이같은 사실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전의 어염상들이 國役을 일부 부담한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의 보호 아래, 도성 안에서 고압적인 자세로 상행위를 함으로써 유통체계상 뒤로 밀리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어염을 거래하는 사상들은 창의적인 상술과 적극적인 상행위로 어염유통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이같은 풍조는 이윤추구 행위를 자극하여 사상 이외의 사람들까지도 충동시켜 위에서 보는 것처럼 수도권 어염유통에 가담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추세로 말미암아 시전들은 위축되어 갔다.0630) 시전 가운데 대표적인 육의전은 정조 15년(1791)「辛亥通共」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특권을 계속 구사하고 있었지만 시대의 진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결과 사상들의 집합소이면서 백성들의 구매장이었던 梨峴·七牌 등은 나날이 번창해 나갔다. 특히 칠패장은 한강과 서해로부터 들어오는 어염의 판매장소로 유명했기0631) 때문에 수도권 어염유통에 있어서 큰 구실을 하였다.
조선 후기 수도권 소금유통상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또 하나의 집단은 船商들이었다. 육상교통이 제대로 발달되지 못한 당시에 소금의 수도권 반입은 주로 水運에 의지하였다. 그러므로 선상의 활약이 커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상업활동상 船主人이 필요하였다. 즉 선상들이 소금을 팔기 위하여 수도권에 들어오면 우선 이들에게 의존하였으므로0632) 양자간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였다.
한강을 무대로 상업활동을 하는 선상들의 배는 소금 등을 대량으로 운송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선박의 규모도 지방의 그것보다 훨씬 컸다.0633) 이같은 큰 배로 수도권 일대에서 소금 등을 유통하는 사업에 종사하기만 하면,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컸던 것이다.0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