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공염정책
公鹽이란 대체로 국가가 직영하는 鹽場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주로 지칭하지만, 때로는 각 관청이 자체의 경비충당을 위하여 생산하는 소금과 宮房이 관리하면서 세금을 거두는 소금까지 포괄적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국가재정과 각 관청 및 궁방의 경비 사이에 구별하기 어려운 부분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0642)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사염의 성격이 보다 강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공염의 개념을 정부나 그 산하기관이 직영하는 염장에서 생산되는 소금으로 제한하고자 한다.
조선은 건국 당시부터 각 도별로 鹽場官이 중심이 되어 국가재정에 충당하고자 공염을 생산했으나 그것이 갖는 부정적 성격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시행하였다. 따라서 경영형태는 사염의 성격도 지니는 애매한 모양으로 곧잘 추진되었다.0643)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재정난이 심해지자 정부가 앞장 서서 철저한 공염제 실시를 주장하였다.
우리 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소금의 이익이 많으나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것을 금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익을 많이 얻을 수 없습니다. 비록 중국과 같이 전면적으로 소금의 專賣制는 실시할 수 없겠지만 어느 정도 공염제를 시행하여 국가에 보탬이 되도록 합시다(≪備邊司謄錄≫3책, 인조 2년 4월 17일).
이와 비슷한 시기에 經筵知事 韓汝稷도 공염제 추진을 적극 주장하였다. 즉 그는 소금생산지로 유명한 서산과 태안지방에 국가에서 소금굽는 일을 전담하는 관리를 파견하여, 이것을 주관하도록 하면 국가재정이 넉넉해질 것이라고 역설하였다.0644) 그 후 18세기초에 이르러 삼남지방을 비롯하여, 전국에 흉년이 닥치자 당시 우의정 趙文命은 중국 齊나라의 소금 전매제를 모방하여 기근과 재정난을 동시에 해결하자고 주장하였다.0645)
이와 같은 일련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공염제가 안고 있는 부정적 측면 때문에 철저한 공염정책은 추진되지 못하고,0646) 그것마저도 반대의견에 부딪쳐 좌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공염제에 반대하는 의견이 이처럼 많기는 했지만,0647) 국가는 기근을 당하거나 재정적으로 궁핍하게 되면 이것을 타개하기 위하여 폐단이 많은 공염제를 제한된 범위 안에서 한시적으로 시행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공염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기 어려웠던 또 다른 배경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시대의 일반적인 추세가 모든 산업분야에서 관권의 개입과 통제를 축소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영업행위를 확대하려는 경향이었으므로, 공염정책 추진의 입장이 더욱 불리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