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상운송
중세적 질서로 강하게 편제된 듯이 보였던 조선사회는 16세기에 이미 여러 면에서 분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兩亂을 겪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지배체제의 모순을 크게 드러냈다. 그러한 과정에서 격심한 사회변동과 아울러 경제성장의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사회적 분업이 진전됨에 따라 농업경영에서 생산력의 증대 현상이 주목되었고, 상공업분야에서는 자본의 집적 현상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조선 후기사회에서 생산력이 증대되고, 그 잉여생산물이 처분되면서 자본의 집적이 가능했다고 하면, 그것을 매개하는 기본적 역할은 운송체계가 담당하였다고 하겠다. 운송체계란 物貨의 지역 간 이동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특히 생산력이 증대되고 있는 사회에서 주목된다. 운송은 생산능력에서뿐만 아니라 물화의 가치에 있어서도 그 효과를 증대시켜 준다. 실로 자본축적의 전제가 되는 전국적 市場圈 또는 원격지무역을 위하여는 운송체계의 발달이 필수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봉건적 조선왕조는 모든 산업을 국가가 규제하여 초기에는 생산활동이 상품의 유통을 자극할 만큼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물화의 생산이 늘어나고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성장이 진전되면서 상품화폐경제가 눈에 띄게 발달하였다. 전국 곳곳에 상품유통의 장이 마련되어 갔으니, 도시에서는 종래의 市廛 이외에 亂廛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생겨났고 지방에서는 場市와 浦口가 상품유통의 거점으로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조선 후기라 하더라도 17세기에는 국지적 商圈을 중심으로 상품이 유통되었으나,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장시와 장시, 장시와 포구, 포구와 포구가 서로 연계되면서 전국이 하나의 상권으로 형성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물화의 유통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선박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육상운송보다는 수상운송이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이유는 車 등이 보급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수로가 육로보다 대량의 화물을 운반하는 데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세곡운송 용역과정에서 수상운송의 경험이 축적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원격지교역은 그것이 官物이건 私物이건 간에 수로가 주로 이용되었으며, 육로는 수로를 통하여 교역된 상품을 지역적 유통권 내부에서 분배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시기에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수상운송의 중요성에 대하여 그 인식이 제고되고 있었다. 실학자 朴齊家는 가난을 구하는 길은 농사짓는 것보다는 장사하는 길뿐이라고 하였다.0707) 그런데 상업이 발달하려면 우선 교통이 발달되어야 한다. 즉 수레와 선박을 쓰면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전국적인 시장이 발달하며, 그렇게 되면 농업과 수공업도 아울러 발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통상하는 자는 반드시 물길을 좋아하는데, 그 까닭은 수레 백 채에 싣는 양이 배 한 척에 싣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육로로 천 리를 가는 것이 뱃길로 만 리를 가는 것보다 편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그는 수상운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대책의 강구를 요구하였다.≪擇里志≫의 저자인 李重煥도 물화의 유통에는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0708) 즉 사람들은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면서 모두 말에다 물화를 싣고 다닌다. 그러나 말에 짐을 싣고 다니면 길이 멀 때는 비용만 많이 허비하고 소득은 적으므로 물화의 운송은 船運에 의해야 한다. 해로와 수로의 활용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林園經濟志≫에서도 그 이유가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0709) 확실히 수상운송이 경제적이었고 현실적으로도 수상운송의 역할이 날로 증대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수상운송을 주도한 船人들은 일찍이 16세기 이래로 세곡과 소작료운송에서 토대를 굳힌 私船人들이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京江船人·地土船人 등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관물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운송해야 하는 화물은 모두 운송하고자 해서 운송용역을 전문화시키고자 했고, 그러한 가운데 합법적인 운임의 취득뿐 아니라 불법적인 수단까지 강구하여 영리를 꾀하였다.
선인들은 전국을 활동무대로 하였다. 徐有榘에 의하면, 조선 후기 수상운송의 무대는 3개의 유통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0710) 첫째는 한강 어구에서 충청도·전라도 연해안을 거쳐 남해안에 이르는 유통로이고, 다음은 한강 하구에서 북쪽으로 황해도·평안도 연해안에 이르는 유통로이며, 그리고 동해안에 위치하여 경상도·강원도·함경도 연해안을 잇는 유통로가 그것이었다. 이들 중 첫째의 서·남해안 유통로는 조선 전기 이래로 주로 세곡 운송로와 소작료 운송로로 이용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상품의 유통로로서 그 기능이 강화되었다. 서·북해안 유통로는 군량미 운송로로서 정부가 주로 이용하였으나, 16세기 이후 이들 지역에 농장이 다수 생겨나면서 소작료 운송로로서 주목되었다. 동해안 유통로는 뱃길이 서해안·남해안의 그것과 달라서 그 지역의 지토선이 주로 운항하고 있었다. 북어와 같은 해산물의 운송이나 진휼미의 운송이 종종 이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