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경·영주인과 영저도고의 활동
가. 경주인의 도고활동
대동법 실시 이후 방납권의 정비를 통한 특권상인체계의 확립과정에서0841) 공인으로 전환되어 간 사람들로 우선 京主人을 들 수 있다. 알려져 있듯이 경주인은 본래 중앙과 지방의 연락기관으로 서울에 설치된 각 군·현의 邸舍인 京邸를 맡아 경영하던 사람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지방민의 접대와 보호, 문서의 연락, 지방 歲貢의 책임 납부, 選上노비의 上番·입역 등의 주선, 신구수령의 迎送 등이었지만,0842)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방 공물의 상납과 주선이었다. 지방의 공물상납을 맡고 있는 관리인 貢吏는 경주인의 알선에 의해 공물을 상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0843)
향리층의 요역이었던 경주인역은 17세기 전반까지는 고역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0844) 16세기 중반 무렵부터 공물의 구매·상납을 전업적으로 청부받는 防納私主人이 형성·성장함에 따라0845) 경주인이 쥐고 있던 공물방납권과 같은 이권이 쇠퇴하게 되었고, 各司의 침탈과 貢吏의 서울 투숙도 감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0846)
그러나 경주인 모두가 방납활동과 전혀 무관한 존재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방납사주인의 성장에 따라 경저가 쇠퇴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경주인의 방납활동은 계속되었다. 경주인 가운데 일부가 사주인층과 결탁하여 여전히 방납에 관여,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0847) 이에 정부에서는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경주인의 방납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지방민의 경주인 입역을 폐지하고, 대신 서울 거주자를 경주인으로 정하고 그에 대한 역가를 지급하는 조치를 내리게 되었다.0848) 이에 따라 경주인은 선혜청에서 역가를 지급받는 선혜청 57공의 하나로서 공인의 임무와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경주인권은 이권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양반관료, 각 사의 吏胥輩, 경강상인, 공인 등 경제력을 가진 자들의 재산 증식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경주인이 관권과 유착된 형태로 이권화되면서 경주인권은 상당한 경제력을 소유한 자가 아니면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소수의 특정인이 공인권과 아울러 경주인권 등 각종의 주인권을 소유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18세기초에는 이미 각 사의 이서가 경주인역을 담당하고 있었고,0849) 심지어는 판서의 지위에 있는 사람까지 경주인권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경주인권에 대한 투자는 신분과는 무관한 사정이 되었다. 丁若鏞이 이전과 달리 문무고관을 비롯하여 권력있는 이서배나 권세가의 傔從들이 경주인역을 맡고 있다고0850) 말한 것은 경주인에 대한 당시의 인식의 변화상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결국 경주인권은 상당한 정도의 권력 내지 경제력을 지닌 소수인의 몫이 되었고, 이는 곧 경주인 내부에도 분화를 일으켜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시킬 정도가 되었다.0851)
경주인권은 18세기 이후 매매가가 상승되면서 다른 주인권에 비해 고가로 매매되었다. 다소 과장된 이야기로도 들리지만, 정약용이 경주인의 역가가 날마다 증가하고 이익이 매우 많아 경주인권의 매매가가 수십 년 전에 비해 백 배나 올랐다고 말한 것도0852) 경주인권의 매매가가 예전과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말일 것이다. 경주인권의 가치를 결정하는 지표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역가와 공물·진상 등의 상납과정에서의 잉여, 경주인권이 보장하는 특권을 상업활동에 이용하여 얻는 이윤 등에 의해 규정되었다.
경주인은 경주인권이라는 특권과 자신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공물·진상 상납 등 부세징수구조에 편승하여 도고활동을 벌여 나갔다. 江界경주인의 경우 서울의 군문과 결탁하여 주전소에서 인삼가를 미리 지급받아 도고활동을 하거나, 강계좌수·부사, 京商과 결탁해 蔘戶를 선대제적으로 지배하면서 도고활동을 벌였다. 19세기초 濟州의 경주인은 제주의 사상, 서울의 笠匠과 결탁하여 서울에서 涼臺를 매매함으로써, 양대도고를 벌이고 있던 개성상인과 함께 서울 涼臺廛의 상권을 크게 위축시켰다. 함경도 鏡城의 경주인은 함흥감영의 營主人과 결탁하여 녹용·인삼·細布·貂皮 등 함경도 진상물의 담당을 독점하고 있었다. 경주인들은 또한 곡물유통구조의 지역적·계절적 차이를 이용하여 逋欠도 하였고, 농민에 대한 고리대적 수탈도 가하고 있었다.
요컨대 경주인은 부세징수구조에 편승하여 경주인권이 보장하는 특권을 바탕으로 상업활동을 벌여 나갔으며, 그들의 상업활동은 부등가교환에 의한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을 기반으로 한 도고활동이었다 하겠다.0853)
0841) | 이지원,<16·17세기 전반 貢物防納의 構造와 流通經濟的 性格>(≪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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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2) | 李光麟,<京主人硏究>(≪人文科學≫7, 延世大, 1962). 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洋文庫, 1964). |
0843) | 田川孝三, 위의 책, 341쪽. |
0844) | 金炫榮,<17세기 안동지방의 惡籍,<人吏諸官屬記過>에 대하여>(≪古文書硏究≫1, 1991), 81∼83쪽. |
0845) | 이지원,<16·17세기 전반 공물방납의 전개와 구조>(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84), 29∼31쪽. |
0846) | 李光麟, 앞의 글, 258쪽. 田川孝三, 앞의 책, 617쪽. 金鎭鳳,<朝鮮前期의 貢物防納에 대하여>(≪史學硏究≫26, 1975), 177쪽. |
0847) | 金東哲, 앞의 책, 165∼166쪽. |
0848) | 韓榮國,<湖南에 실시된 大同法(2)>(≪歷史學報≫20, 1963), 76쪽. |
0849) | ≪承政院日記≫449책, 숙종 35년 6월 13일. |
0850) | 丁若鏞,≪經世遺表≫권 2, 秋官刑曹 5, 刑官之屬 掌胥院. |
0851) | 金東哲, 앞의 책, 169∼170쪽. |
0852) | 丁若鏞,≪經世遺表≫권 2, 秋官刑曹 5, 刑官之屬 掌胥院. |
0853) | 이상 경주인에 대한 서술은 金東哲, 앞의 책, 163∼204·246∼248쪽에 주로 의존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