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영주인의 도고활동
영주인은 각 감영에 설치된 營邸를 관장하는 각 읍의 아전 출신으로 감영과 군현의 연락사무를 주로 담당하던 사람이었다.0854) 초기에는 읍리가 영주인으로 選上立番하거나, 賤隷·하졸들이 담당하는 부역적 성격이 강했으며, 역가도 얼마되지 않았고 권력도 별반 없었다.0855)
그러나 18세기 이래 현물로 바치던 외방공물이 營作貢으로 전환되면서 영주인은 영작공의 담당자로 편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역가·진상가의 증가를 도모하였다. 영주인이 영작공을 담당하게 된 것은 각 군현이 진상품을 현물로 바치는 데에서 오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0856) 영공을 담당하기 위한 영주인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였다.0857) 세력있는 營屬이나 부상들이 영주인역을 담당해가는 추세 속에서 관권과의 결탁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진상 담당에서 생기는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영작공을 추진했던 것이다.0858) 영주인역은 이제 천예·하졸들의 단순한 부역이 아니라 권력과 경제력을 담보한 권리로 정착되었으며, 역가·진상가의 증가에 따라 영주인권의 매매가 역시 상승하게 되어 경주인권보다 훨씬 높은 고가로 매매되기도 하였다.
영주인의 영공 담당은 감영의 營邸都賈와의 결탁이나 영주인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외방공물의 상납이 영작공화된 것은 감영이 공물을 직접 구입·조달할 수 있는 유통구조의 발달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감영 소재지의 유통구조는 영주인과 같은 營屬과 이들과 결탁된 도고상인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영주인권은 실리와 권력을 담보한 권리로서 고가로 매매되었고 대대로 전수되었다.0859)
영주인은 진상물의 영공 등을 통하여 집적한 상인자본을 고리대자본으로 활용하였다. 즉 곡가가 앙등하였을 때 數年條의 환곡을 미리 지급받아 곡물시장에 판매, 作錢하여 이를 토대로 고리대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영주인은 일반 농민이나 수령·관속을 대상으로 대차관계를 맺으면서 고율의 邸債를 활용하여 식리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저채는 철종 13년(1862) 농민항쟁시 농민군의 주요 폐정개혁의 대상이 될 만큼 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였다.0860) 결국 영주인은 경주인과 유사하게 공물진상을 독점하면서 도고상업을 벌이고 있었고, 이를 통해 축적한 상인자본을 기초로 고리대자본과의 결합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