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영저도고
영저도고는 지방의 관상도고 가운데 가장 넓게 존재하고 있던 사람들로서, 지방관아에서의 진상물 수납과 관련되어 발달한 상인층이었다.0861) 영저도고는 지방관아의 진상물 수납에 있어서 농민생산품의 납부는 대부분 거부되고, 관부와 결탁한 상인의 상품만이 용납되는 사정 속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감영소재지에서 발달한 도고상인은 서울의 시전과 달리 금난전권과 같은 특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감영의 영리들과 깊이 결탁되어 있었고, 따라서 그들의 상품이 아니면 실질적으로 진상품이 될 수 없었던 실정을 고려한다면, 지방관아 도시에서의 도고상인의 특권성은 충분히 보장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0862)
영저도고는 감영의 관속, 영주인, 사상 등과 결탁, 농촌사회에서의 상품경제의 발달에 적극 개입하여 도고상업을 벌여나갔다. 예를 들어 함흥지역의 영저도고의 경우를 보면, 영주인·審藥 등과 결탁하여 진상과정에서 각종 點退를 자행하면서 자신들이 판매하는 녹용만을 진상물로 수납함으로써 녹용 진상을 매개로 한 녹용 매매를 독점하고 있었다.0863) 경상도에서도 영저도고로 보이는 ‘관속도고배’가 진상삼의 조달과 관련하여 인삼을 매점하고 가격을 조절함으로써 인삼상납과정에서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0864) 함흥의 부상도고의 경우, 貂鼠皮의 매점을 위해 三水와 甲山民들을 선대제적으로 지배하기도 하였으며,0865) 황해도감영의 試紙都賈는 이 지역에서 실시하는 과거에 사용되는 시지를 독점적으로 조달하여 시지의 가격이 폭등되는 결과를 야기시키기도 하였다.0866) 지방관아와 영주인·사상·심약·경주인 등 공물 진상과 관련된 여러 계층과 결탁·유착되어 구조적으로 깊은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있던 영저도고들은 감영을 중심으로 한 상품유통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현과 연계된 지역적 市場圈에 대해서도 장악해 나갔다.0867)
요컨대 영저도고의 활동은 수취체제에 있어서 농민과 지방관아 사이의 중개자로서 상인의 개입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발달한 지방의 상품경제의 유통구조 속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관권과의 결탁에 기초를 두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특권적 매점상업의 발달은 개별 상업자본의 가치액을 증대시켰고, 나아가 상업자본의 집적을 가능하게 하였다.0868)
0861) | 姜萬吉, 앞의 책, 17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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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2) | 姜萬吉, 위의 책, 173쪽. |
0863) | ≪正祖實錄≫권 30, 정조 14년 4월 경진. 姜萬吉, 위의 책, 172∼173쪽. 許在惠,<18세기 醫官의 經濟的 活動樣相>(≪韓國史硏究≫71, 1990). 金東哲, 앞의 책, 225∼229쪽 참조. |
0864) | ≪正祖實錄≫권 30, 정조 14년 4월 경진. 姜萬吉, 위의 책, 173쪽. |
0865) | ≪承政院日記≫1725책, 정조 18년 정월 9일. |
0866) | ≪海營日記≫을묘년(철종 6) 12월 3일. 姜萬吉, 앞의 책, 174쪽. |
0867) | 金東哲, 앞의 책, 230쪽. |
0868) | 姜萬吉, 앞의 책, 17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