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3권 조선 후기의 경제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4. 대외무역의 전개2) 일본과의 무역(3) 상품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1. 인구의 증가와 분포
          • 1) 인구의 증감
          • 2) 인구의 분포
        • 2.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상품작물의 재배
          • 1) 수전농업의 생산력
            • (1) 이앙법의 보급
            • (2) 새로운 품종의 보급
            • (3) 시비법의 발달
            • (4) 새로운 농업기술의 보급
          • 2) 한전농업의 생산력
            • (1) 품종의 증가와 새로운 작물의 보급
            • (2) 새로운 농업기술의 보급
            • (3) 시비법의 발달
            • (4) 윤작의 실시
          • 3) 농구와 수리시설
            • (1) 농기구의 발달
            • (2) 수리시설의 확대
            • (3) 상품작물의 재배
        • 3. 광작과 지주제
          • 1) 농촌사회 분해와 광작농의 대두
            • (1) 광작과 광작농
            • (2) 광작론과 반광작론
          • 2) 지주제의 변동
            • (1) 농촌사회 분해와 토지의 상품화
            • (2) 지주제의 변동과 그 대책
          • 3) 농업에서의 자본주의 맹아론
            • (1) 자본주의 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
            • (2)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
        • 4. 임노동의 발생
          • 1) 농민층의 분화
            • (1) 부역제의 한계
            • (2) 노동력 수요의 증대
            • (3) 노동예비군의 형성
          • 2) 임노동자의 출현
            • (1) 유민의 증대와 대책
            • (2) 고용관계의 수립
          • 3) 임노동의 양상
            • (1) 임노동의 종류
            • (2) 임노동의 조건
        • 5. 수공업의 발달
          • 1) 자영수공업체제의 형성과 발전
          • 2) 상업자본의 생산적 전회와 선대제의 발생
          • 3) 매뉴팩처의 발생
            • (1) 유기산업부문
            • (2) 야철산업부문
            • (3) 직물산업부문
            • (4) 광업부문
        • 6. 광업의 발달
          • 1) 18세기「별장」제하의 광업 실태
            • (1)「별장」제의 성립과 군수광업의 몰락
            • (2)「별장」제하 은점의 경영 실태
          • 2) 18세기말 19세기 전반「물주」제하의 광업 실태
            • (1)「별장」제의 폐지와「수령수세」제의 성립
            • (2) 물주제하의 광산경영 실태
        • 7. 어·염업의 발달
          • 1) 어업
            • (1)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어업의 발달
            • (2) 수산물의 종류
            • (3) 어구·어법
            • (4) 어전·방렴류
            • (5) 대규모 어업의 발달
            • (6) 수산양식업
            • (7) 수산제조업
          • 2) 염업
            • (1) 소금과 염업의 중요성
            • (2) 소금 생산방법
            • (3) 제염기술의 발전
            • (4) 소금의 유통구조
            • (5) 염업에 대한 정책
        • 8. 운수업의 발달
          • 1) 육상운송
            • (1) 조선 후기 역의 운영 실태
            • (2) 파발제의 성립과 발달
            • (3) 역마확보의 변화와 고립제
          • 2) 수상운송
            • (1) 관물의 운송
            • (2) 사물의 운송
          • 3) 원과 주막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1. 상인층의 성장과 도고상업의 전개
          • 1) 관상도고의 활동
            • (1) 시전도고의 활동
            • (2) 공인의 활동과 공인자본의 성격
            • (3) 경·영주인과 영저도고의 활동
          • 2) 사상도고의 활동
            • 가. 서울지역에서의 사상의 활동과 신해통공
            • 나. 서울 주변지역에서의 사상도고의 활동
            • 다. 상품생산지 및 집산지에서의 사상도고의 활동
          • 3) 반도고활동의 전개와 상업계의 동향
            • 가. 관상도고에 대한 반도고운동
            • 나. 사상도고에 대한 반도고운동
        • 2. 상품의 유통
          • 1) 농촌장시의 발달
            • (1) 상업적 농업과 농촌수공업의 발달
            • (2) 육상교통의 발달과 장시의 증가
            • (3) 농촌장시의 발달과 시장권 확대
          • 2) 포구상업의 발달
            • (1) 해상교통의 발달과 포구시장권의 형성
            • (2) 경강포구의 상업발달
            • (3) 외방포구의 상업발달
            • (4) 포구상업세력의 성장과 상품유통
          • 3) 상업도시의 형성
            • (1) 전국적 시장권의 형성
            • (2) 서울의 상업도시로의 성장
            • (3) 지방 상업도시의 출현
          • 4) 상업자본의 축적
            • (1) 시전상업체제의 변동과 사상의 성장
            • (2) 도고상업과 상업자본의 축적
            • (3) 상업자본의 생산자 지배
        • 3. 금속화폐의 보급과 조세금납화
          • 1) 금속화폐의 보급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1) 동전유통 정착의 경제적 기반
            • (2) 17세기말∼18세기 중엽 금속화폐의 유통
            • (3) 18세기 후반∼19세기 중엽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2) 조세금납화와 봉건적 수취체제의 해체
            • (1) 조세금납의 성립조건-17세기 수취제도의 모순
            • (2) 17세기말∼19세기 중엽 조세금납의 전개
            • (3) 19세기 전반 화폐수탈의 급증과 사회적 모순의 심화
        • 4. 대외무역의 전개
          • 1) 청과의 무역
            • (1) 17세기 부연역관의 청·일 간 중계무역
            • (2) 17세기말 18세기 전반 무역별장의 등장과 역관·상인 간의 대립
            • (3)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 연상무역의 발전과 산업부문 침투
          • 2) 일본과의 무역
            • (1) 무역의 범주
            • (2) 상인
            • (3) 상품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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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가. 수출품

 조선이 일본에 수출한 물품은 종류가 매우 다양할 뿐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보였다. 조선의 수출품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人蔘과 미곡이다. 비단의 원료인 중국산 白絲와 生絲의 대일수출도 이루어지고는 있었지만,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오는 경로가 막히는 바람에 일본에 대한 수출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가) 인 삼

 조선산 인삼은 유통 마진이 매우 큰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조선측이나 일본측 모두 인삼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조선 국내의 인삼조달이 부진의 늪에 빠지게 되고, 게다가 일본이 인삼의 수입대체에 성공하면서,1228) 조선의 인삼수출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19세기까지도 인삼의 대일수출은 계속되었다.

 당시 조선의 수출 인삼은 山蔘으로 불리는 자연삼이었기 때문에 부존량이 제한되어 있었다.1229) 그래서 조선의 인삼 공급은 늘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해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조선의 인삼공급량 부족도 문제였지만 더욱 큰 문제는 인삼의 품질이 갈수록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도라지에 인삼 껍질을 입혀 위장한다든지, 인삼에 아연으로 된 심을 박아 무게를 늘리기도 했으며, 인삼의 실뿌리에 아교를 발라 속이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삼을 造蔘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측은 불량품이라는 이유로 수령을 거부하였다.1230)

 조삼의 제조에는 조선의 역관들이 개입되기도 했지만,1231) 주로 더 많은 이득을 얻으려는 상인들이 가담했다. 또 인삼의 貢納 의무를 지고 있던 농민들이 부거운 부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인삼의 품질을 속이는 경우도 있었다.1232) 실제로 강원도와 평안도의 수령들은 인삼 공납에 따르는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 달라고 여러 차례 중앙에 요청하기도 하였다.1233)

 인삼을 둘러싼 무역마찰이 심각해지자 조선정부는 공무역에서 지급하는 禮單蔘(單蔘)을 자연삼(山蔘)에서 재배삼(家蔘)으로 바꾸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선은 辛未通信使(1811)의 일본 방문을 앞두고 펼쳐진 양국간 사전 교섭을 이용하여 통신사가 가지고 갈 인삼(信蔘)과 공무역에서 지급할 인삼(예단삼)을 모두 재배삼인 가삼으로 바꾸려고 했다.1234) 그러나 일본측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순조 32년(1832)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단삼을 현물 인삼과 銀·錢으로 1/3씩 지급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말하자면 예단삼의 代納(金納化)이 이루어진 셈이다.1235)

 조선의 인삼은 사무역을 통해서도 수출되었다. 조선정부는 사무역에서 수출되는 인삼에 10%의 세금을 매겨 그것을 공무역에서 지급할 예단삼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또 일본측은 조선으로부터 인삼을 안정적으로 수입해가기 위해 조선의 상인들에게 인삼 대금을 미리 지불하는 先貸去來(被執)의 방법을 자주 이용하였다. 그런데 조선정부는 부존량이 제한된 인삼이 사무역 상인들의 수중에 몰리게 되면 예단삼과 신삼의 조달이 어려워지게 되고, 또 선불된 대금에 해당하는 인삼의 조달을 조선상인들이 지체하여 양국간 무역마찰이 일어나기 때문에 선대 거래를 허용하지 않았다.

 한편 조선정부는 인삼무역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왜관의 지정된 장소 즉, 開市大廳에서 특권상인인 동래상인들만이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감독관인 開市監官의 감시를 피하여 인삼을 밀거래하는 일이 많았다. 또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민간상인들도 왜관 밖에서 일본의 선원들과 인삼을 밀매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바다에 배를 대놓고 밀수를 하다가 적발된 사례도 있었다. 조선정부는 인삼 밀무역을 하다가 적발된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엄하게 다스렸지만, 이후에도 인삼밀수는 끊이지 않았다.1236)

나) 미 곡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정부가 일본에서 건너온 사신들에게 왜관 체재비 명목으로 지급한 쌀이다. 5일마다 지급했다 하여 붙여진 五日雜物(五日次) 속에 쌀도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접대비였다. 두번째는 공무역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쌀을 일본으로 수출했는데 이 쌀을 公作米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위의 공식 경로를 벗어나 민간상인들이나 지방의 수령 또는 하급 관리들의 손을 거쳐 조선의 쌀이 불법적으로 유출되는 경우도 있었다.1237)

 그런데 조선정부가 경제적 재화로서 쌀을 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조선정부가 대마도에 歲賜米豆를 지급한 적이 있었지만, 거의 해마다 정해진 수량의 쌀을 무역하기 시작한 것은 효종 2년(1651) 이후의 일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이 공무역을 통해 들여온 물품에 대하여 처음에는 물품화폐의 일종인 木綿(公木)으로 결제를 해 주었다.1238) 그런데 조선쪽에서는 공목의 지급량을 줄인다든가 공목의 길이를 짧게 하거나 면포의 섬세도를 떨어뜨리는 방법을 사용하여 부담을 줄이려 했다.1239) 이에 일본측이 공목의 품질 악화를 이유로 수령을 거부하여 무역마찰이 끊이지 않자,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공작미 지급의 시행이었다. 그리하여 효종 2년에는 公木 300同(15,000匹)을 쌀 12,000石(조선의 단위임, 이하 같음)으로 바꾸어 지급하다가 현종 원년(1660)에는 100동을 추가하여 공목 400동(20,000필)을 쌀 16,000석으로 대신 지급했다. 물론 처음부터 공작미 지급 기한이 5년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기한이 끝날 때마다 일본측은 사신(公作米年限裁判)을 보내와 공작미의 지급 기한 연장을 요구했다. 조선정부에서는 허가 여부를 놓고 여러 차례 논의를 거치곤 했지만, 그 때마다 결국에는 기한을 정하여(5년이나 3년 또는 10년) 공작미 지급을 연장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공작미 지급은 일본측에 한시적으로 특혜를 베푸는 것이지 반드시 常時的으로 시행해야 하는 約條는 아니라는 것이 조선정부의 일관된 방침이었다.1240)

 그런데 19세기초에 이르러 공작미 지급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신미통신사의 訪日을 앞두고 양국이 실무 교섭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측이 공작미의 교환비율을 인상한 것이다. 즉 효종 2년(1651) 이후 조선정부가 공작미 지급을 허락하면서 공목 1필을 공작미 12斗(말)로 환산하여 지급해오던 것을,1241) 공목 1필에 공작미 10두로 변경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공작미 지급으로 말미암은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16,000석씩 지급되던 공작미가 순조 12년(1812) 이후에는 13,333석 5두로 줄었다.1242) 일본(대마번)측에서 보면 해마다 2,666석 10두에 해당하는 쌀의 수입이 줄어든 셈이지만 조선농민의 부담은 그만큼 경감되었다고 할 수 있다.1243)

 공작미 지급의 또 다른 변화는 공작미의 일부를 錢으로 대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공작미의 품질 악화와 未收 누적 때문이었다. 조선쪽 공작미 관리 책임자들이 쌀에 뉘를 넣거나 물을 적셔 부피와 무게를 늘리는 수법을 쓰는 바람에 쌀이 왜관의 창고에서 썩기 일쑤였다. 그뿐 아니라 공작미의 미수가 누적되어 일본측의 불만을 샀다.1244) 따라서 조선정부로서도 새로운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쌀 지급을 중단하고 원래대로 면포(공목)로 지급하자든가, 한시제를 없애고 공작미 지급량을 절반으로 줄이자는 따위의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시행되지는 않았다.1245) 일본측에서도 갈수록 미수가 늘어가는 상황에서 전량을 쌀로 받아가기 어렵다면 뭔가 다른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양국의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오랜 교섭 끝에 19세기 전반부터는 공작미의 일부를 전으로 대납하기도 했다.1246)

다) 우피·우각조·황금·전해서

 이들 품목은 18세기 후반 이후 대일무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 이전까지 수출의 주종을 이루던 인삼과 생사에 대신해서 이들 물품이 대일무역을 주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牛皮(소가죽)는 幕府 말기부터 수요가 급증한 군수물자의 원료로서 사용되었으며, 말린 해삼(煎海鼠)은 일본이 중국에 재수출하기 위해 조달해간 것이다. 黃芩은 한약재의 원료로 쓰이고 있었으며, 牛角爪(소뿔·발톱)는 빗(櫛)이나 비녀의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일본이 수입해간 것이다.

 19세기 대일무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우피의 사무역량을 살펴보면<표 2>와 같다. 헌종 10∼15년(1844∼1849)의 6년 동안 13명의 都中들에 의해 12만 장(연평균 2만 장)에 이르는 우피가 일본에 수출되었다. 도중별로 보면 子範의 수출 실적이 총 28,159매로 단연 앞섰다. 또 계절적으로 3∼6월과 11∼12월의 수출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品目
都中

1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乃維 乃子 子範 聖愚 五元 汝心 宜汝 沖謙 汝行 永緝 子五 子權 子雄 玉汝 합 계





 1   500 1,400 640   1,650 200   560 430 500   100   5,980
 2     1,822 570   700 400   100 546     310   4,448
 3   900 4,374 100 1,500 2,700 1,100   900 480         12,054
 4   1,000 2,233 1,479 2,120 2,280 799   520 5,108 999 521     17,059
 5   1,800 3,195   550 1,600 521   220 3,180   133 1,939   13,138
 6   700 4,701 170 958   800   657 215 400   1,480   10,081
 7     100   630 2,065 4,263   1,350 312     400   9,120
 8   600 1,850 200 510 830 360   1,980 160         6,490
 9   1,300 1,677 100 1,040 1,560 100 300 1,564 1,122         8,763
10   400 1,767 940   1,000 300   53 700   600 1,500   7,260
11   400 960 1,131 650 900 371   3,533 3,930   490 2,800 400 15,565
12 300 700 4,080 490 300 2,527 99   650 970     640   10,756
  300 8,300 28,159 5,820 8,258 17,812 9,313 300 12,087 17,153 1,899 1,744 9,169 400 120,714

<표 2>牛皮의 월별 수출량(헌종 10∼헌종 15년)

자료:≪一代官每日記≫(國史編纂委員會 所藏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
 비고:헌종 12년의 윤5월과 헌종 15년의 윤4월은 각기 5월과 4월 항목에 합산. 빈칸은 零임.

라) 기 타

 조선이 일본에 수출한 물품으로는 이 외에도 織物類·乾魚物·乾果類·皮革類·書籍類·文具類와 茶器·茶碗 따위 각종 생활용품, 醫藥品 등이 있었다. 또 도자기나 그릇을 만드는 기술자(陶工), 병을 고치는 醫員 등 인력수출도 이루어졌다.1247) 따라서 민간인의 해외 도항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에도 조선이 일본에 수출한 유형·무형의 재화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살아 있는 동물의 수출로는 말(馬)이나 매(鷹)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예컨대 매는 고대 이래로 우리 나라의 수출 품목이었는데, 고려시대에는 鷹坊을 설치하여 국가가 매 조달과 매사냥을 관장하기도 했다. 이런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계승되었다.1248) 일본으로 매가 대량 수출되는 것은 조선시대 이후의 일로 생각된다. 壬辰·丁酉倭亂이 끝나고 국교가 회복된 17세기에 들어와서 조선이 일본에 보낸 書契의 物目에도 매(鷹子)가 등장하고 있다.1249) 이처럼 매는 조선이 일본에 가는 통신사편에 보내는 幕府將軍에 대한 예물과 매년 對馬島主의 사신에게 지급하는 예물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매의 貢納 의무를 지고 있었던 강원도지역 농민들은 매 조달 때문에 과중한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1250) 그래서 18세기 후반에 오면 이미 매의 수출 대신에 쌀과 면포가 지급되고 있었다.1251)

1228) 幕府(특히 德川吉宗)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對馬藩을 통해 조선으로부터 인삼 종자를 구해다가 인삼의 수입대체를 추진한 결과, 18세기 초반에 이르면 인삼의 자체 생산에 성공하게 된다(鄭成一,<조선산 인삼종자와 일본의 인삼수입대체>,≪春溪朴光淳敎授華甲紀念 經濟學論叢≫, 1993).
1229) 당시 인삼은 자연에서 채취한 것이었기 때문에 수출의 계절적 변동도 매우 심했다. 예컨대 숙종 10∼36년(1684∼1710)의 기간 중 연간 최고 수출량은 숙종 20년의 6,678근이었는데 그 이듬해에는 최저치인 29근을 기록하였다(田代和生,≪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東京;創文社, 1981, 286∼287쪽). 이처럼 조선의 인삼 수출은 공급 측면의 심한 불안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1230) 그런데도 對馬藩이 조선에서 조달하여 幕府將軍에게 올린 인삼 속에 造蔘이 끼어들어가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今村革丙,≪人蔘史≫7, 蔘名彙攷篇, 朝鮮總督府 專賣局, 1934, 176∼180쪽).
1231)≪分類紀事大綱≫29, 李樟別幅人參取換候事(國史編纂委員會 所藏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
1232)≪肅宗實錄≫권 50, 숙종 37년 8월 3일.
1233)≪肅宗實錄≫권 46, 숙종 34년 7월 18일 및 권 61, 숙종 44년 7월 21일.

≪英祖實錄≫권 110, 영조 44년 4월 20일.

≪正祖實錄≫권 29, 정조 14년 3월 10일·4월 17일 및 권 33, 정조 15년 11월 11일.
1234) 鄭成一,<19세기 초 조선산 栽培蔘의 대일수출 교섭-禮單蔘을 중심으로->(≪國史館論叢≫43, 1993).
1235)≪御內用御內密綴≫(國史編纂委員會 所藏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
1236) 吳 星,≪朝鮮後期 商人硏究≫(一潮閣, 1989) 제1장 참조.
1237)≪備邊司謄錄≫31책, 숙종 원년 7월 28일.
1238) 당시 목면을 公木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관청의 무명(公家之木)이란 뜻이다(≪正祖實錄≫권 24, 정조 11년 9월 갑오).
1239) 鄭成一,<丁卯胡亂과 朝鮮의 貿易政策>(≪史學硏究≫49, 1995), 84∼94쪽.
1240)≪公作米謄錄≫(奎章閣圖書 12968) 을유 12월 5일 및 을사 5월 16일.
1241) 효종 2년에 공작미를 지급하면서 목면과 쌀의 교환비율을 1필=12두로 한 것은, 그 해 쌀이 풍년이 들어 서울에서 가는 무명(細木)의 값이 백미 12두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경상도에서는 1필=5두가 정식이었다고 하니까(≪備邊司謄錄≫30책, 현종 12년 3월 17일), 결국 1필에 7두를 추가 지급한 셈이 되어 이 비율은 일본측에 유리했다고 할 수 있다.
1242)≪東萊府事例≫2책, 書契色(奎章閣圖書 4272).

≪東萊府邑誌≫(1832) 公作米庫(≪東萊史料 二≫, 驪江出版社 影印, 1989).
1243) 공작미 수납과 관련한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준 것은 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숙종 5년(1679)에 경상도 지역에 大同法을 실시하면서 2두를 감해 주었고, 숙종 9년에도 2두를 삭감해 주었다(≪嶺南廳事例≫倭館所用 公作米).
1244) 영조 2년(1726)의 공작미 지급 상황을 보면, 1년간 총지급량이 15,439石(俵)이어서 미수는 561석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6월 24일 이전에 지급된 4,391석의 쌀은 전년도분이기 때문에, 영조 2년의 실질 미수분은 4,952석으로서 전체 지급량 16,000석의 약 1/3을 차지하고 있었다(≪朝鮮御代官記錄≫, 國史編纂委員會 所藏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
1245)≪公作米謄錄≫을사 9월 10일.
1246)≪一代官每日記≫(國史編纂委員會 所藏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
1247)≪倭人求請謄錄≫(奎章閣圖書 12955).

≪歲船鷹連謄錄≫(奎章閣圖書 12966).
1248)≪매사냥 調査報告書≫(文化財管理局, 1993), 5∼31쪽.
1249)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는 書契(9,442점) 중에서는 광해군 7년(1615) 7월 禮曹參議 金闓가 對馬島主에게 보낸 서계가 鷹子를 禮物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는 가장 빠르다(≪書契目錄集≫Ⅰ, 國史編纂委員會, 1991, 1쪽).
1250) 현종 6년(1665)의 일인데 비변사는 동래 왜관에 꼭 보내야 하는데도 미납된 매의 수효가 200여 마리나 되니 경상·강원감사에게 독촉할 것을 국왕에게 제의하고 있다(≪備邊司謄錄≫25책, 현종 6년 7월 3일).
1251)≪古拝借御金御上納御宥免筋御願立ニ付御身代之姿松平越中守樣江被及御內意候御願等之別錄≫(對馬歷史民俗資料館 宗家文庫 記錄類 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