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무역의 성격
첫째, 이 시기에도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誠信을 기초로 한 조선과 일본의「交隣」외교가 무역의 外皮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서 교린이라고 하는 큰 틀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이른바「유무상통」의 정신에 입각하여 양국이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고 있었다.
둘째, 당시의 대일무역은 조선의 국내경제와 결코 무관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公木·公作米와 신삼·예단삼, 그리고 말·매 따위의 수출과 조선농민의 부담이 연결되어 있었다. 또 동·물소뿔 따위의 수입이 각기 조선의 동전 주조, 군수·관수 물자의 제조 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셋째, 조선의 인삼 수출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의 화폐개주로 말미암아 은의 수입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또 중국산 생사 따위의 무역이 퇴조했다. 후추·물소뿔·명반·단목 따위 동남아시아산 물품의 거래도 전에 비해 부진했다. 게다가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와 일본의 직교역 확대로 말미암아 이 시기의 대일무역은 중개무역적 성격이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피·우각조·황금·전해서 따위의 조선산 물품과 일본산 동의 거래가 무역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패턴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여전히 교환되는 물품이 농수산물이나 공예품과 같은 특산물과 광산물 따위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무역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시장의 가격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넷째, 국가권력의 보호 아래 무역을 독점적으로 경영해왔던 상인들도 전반적인 무역 쇠퇴와 함께 零落의 길을 걷게 되어 사무역에 참가하는 상인의 규모도 크게 줄었다. 자연히 무역이 열리는 빈도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특권상인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밀무역이 소멸된 것은 더욱 아니었다.
다섯째, 양국이 서로 약정한 물품을 현물로 교환하던 체제에서, 부분적이지만 공작미·예단삼·매와 물소뿔·납·동의 경우 다른 물건이나 錢으로 대납하는 방법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대일무역이 점차 시장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면서 운용되기 시작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발전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무역은 조선의 직접적인 교역 상대자가 일본의 대마번이었다. 즉 당시 조선의 대일무역이 德川幕府와의 직접적 교역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일무역이 막부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무역구조는 일본의 明治維新과 조선의 開港 이 이루어지는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鄭成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