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봉기
12월에 이르러 주도층은 군사를 더욱 활발히 모집하였다. 우군칙이 운산 광산에서 일할 사람을 모은다는 구실을 내세워 이희저와 朴光有 등의 상인에게서 나온 자금을 바탕으로 1냥 내지 3냥의 선금을 주어 사람들을 다복동으로 불러 모았다. 진두 상인 강득황과 같은 인물은 그곳에서 음식을 팔던 金汝正을 앞세워 12월 초부터 군졸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18일에는 한꺼번에 70여 명을 이끌고 다복동으로 들어갔다. 이 때 끌어들인 사람들은 일반 군사력만이 아니고 봉기군의 깃발을 그리기 위한 병풍 수리공, 무기를 만들기 위한 대장장이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이 때 응모한 사람들은 걸인을 비롯하여 소상인, 마부 등 다양한 업을 지니고 있었고 신분도 위로는 향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지만, 대개가 가산·박천 지역의 땅없는 농민이나 임노동층과 같은 빈민들이었다. 강득황과 같이 군졸을 모으는 사람이나, 응모한 당사자들, 그리고 홍경래와 같은 주도층이 응모자들에 대해 공통적으로 붙인 표현은 가난하거나 굶주린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 모여든 일반 군사력은 봉기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자발적으로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니었다.529)
봉기는 12월 20일로 계획되어 있었다. 봉기군은 銀牌를 만들어 兵符로 이용하고 깃발을 이용하여 軍號를 정했으며 ‘公背’라는 글자가 쓰여진 문서를 통해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도록 하였다. 김창시는 그 이전부터 임신년(순조 12)에 봉기가 일어난다는 뜻을 나타내는 ‘壬申起兵’의 讖緯說을 퍼뜨려 민심을 흔들었다. 그리고 봉기군은 다복동에서의 출병에 앞선 12월 15일에 사람을 보내 평양 대동관을 폭파하고 그곳에서 소동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폭발장치가 물에 젖어 발화시간이 늦어지고 임무를 맡은 자가 도주함으로써 그 계획은 단순한 화재에 그치고 말았다. 17일에는 약속을 맺은 사람들이 구성·태천은 물론 멀리는 해서지역으로부터 다복동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봉기의 움직임이 사전에 수령들에게 포착되어 18일에 선천부사 金益淳이 이희저·김창시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곽산의 朴星信 등은 실제 체포되었다. 이러한 예기치 못한 급박한 사정으로 인하여 봉기는 20일로 예정된 일정을 앞당겨 18일 밤에 급히 일어나게 되었다.530) 봉기군은 가산·박천·안주의 방향과 정주·곽산·선천·철산을 거쳐 의주로 향하는 두 방향으로 나누어 공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홍경래가 都元帥로서 최고 지휘자가 되었다. 홍경래가 지휘하는 남진군은 우군칙과 김창시가 모사로 수행하였고, 선봉장으로는 홍총각이 활약하였으며 尹厚檢이 후군장을 맡았다. 여기에 이희저가 都摠이 되어 행동을 함께 하였다. 뒷날 부원수가 되는 김사용은 북진군을 지휘하였고, 李齊初는 가산 점령에 참여했다가 김사용 밑으로 가 선봉장이 되어 앞장을 섰다.531)
다복동에서는 18일 밤 출진에 앞서 홍경래가 참여자들에게 봉기의 당위성을 천명하였다. 자기는 선천 月峰山 아래 가야동에서 태어난 鄭眞人의 지휘를 받아 일하고 있으며, 그는 강계의 폐사군지역에서 일어나 鐵騎 수만을 이끌고 함경도·강원도·경상도에서 거사하고 있으니 모두들 공을 세우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532) 이어 일반 참여자들도 간단한 무장을 한 후, 봉기군 본대는 다복동에서 출진하여 郡吏 李孟億, 서리 金應錫 등의 안내를 받으면서 3경 무렵에 가산을 점령하였다. 이 때의 군사력은 중간 지휘자로 판단되는 기마인이 30∼40명, 일반 군사력은 100∼150명에 이르렀다. 홍총각의 지휘 아래에 있던 장사 車宗大가 저항하는 군수 鄭蓍를 살해한 후 尹元燮(尹彦涉)을 수령에 해당하는 主管將으로 뽑았다. 이 일에는 정주에서 술을 파는 김아지노미도 참여하였다. 봉기군은 관아의 병기를 수습하는 한편, 민심을 얻고 군사를 모으기 위해 그날로 곡식을 풀어 기민을 구제하였다. 봉기군이 각 지역의 수령들에게 격문을 보내 항복하고 봉기에 가담하라고 위협한 것도 가산을 점령한 19일의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봉기군은 또한 김창시가 지은 편지를 평안병사 李海愚에게 보내 평안도민으로서의 일체감과 불만을 토로하고 그를 조롱하였다.
300명으로 늘어난 봉기군은 19일 저녁에 박천 진두로 진격하였고, 다음날 새벽에는 기병 40여 명과 300명에서 많게는 500명에 달하는 보병을 이끌고 박천으로 들어갔다. 박천군수 任聖皐는 달아났다가 노모가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하였다. 박천 주관장에는 韓一恒이 임명되었다.
봉기군의 원래 계획은 박천에서 영변을 공략한 후 안주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주 병영의 執事인 金大麟과 李仁培가 안주를 먼저 공격해야만 승리한다고 주장하다가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홍경래를 죽여 정부쪽에 공을 세우려 하였다. 홍경래는 민첩하게 피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큰 부상을 입었고, 김대린·이인배는 우군칙 등의 반격을 받아 자결하거나 피살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李茂京 등 안주 병영에서 가담한 다른 인물들도 제거되었다. 지도부는 홍경래의 회복을 기다리기 위해 21일에 가산 다복동으로 돌아갔고, 일반 가담자들은 대정강 일대 또는 다복동에 모여 있게 되었다.
그 동안 영변에서는 羅大坤 등의 선발대가 내응을 위해 다수 성내로 들어가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사 吳淵常은 병영으로부터 통보를 받고 소문을 탐지하여 경계를 엄히 하기 시작하였다. 22일에는 운산군수 韓象黙과 개천군수 任白觀이 군인을 끌고와서 내응하는 자가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 그리하여 가산과 박천의 피난민을 성밖으로 몰아내고 내응자를 색출하였다. 이에 박천의 李萬奉, 가산의 康守興과 그의 아들 允宅·允學·允成, 안주 상인 나대곤, 영변 좌수 金遇鶴, 영변 수성중군 南益顯·李益秀 등의 주도자들과 그 휘하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봉기군의 영변 진격은 여의치 못한 상태가 되었지만, 계획대로 태천을 공략하였다. 남진군에서 파견된 병력은 태천 남창에서 일차 곡식을 풀어 민인에게 나누어 준 후 23일에 座首 金允海, 倉監 邊大益 등의 영접을 받으며 읍으로 들어갔다. 태천현감 柳鼎養은 봉기군의 위세에 놀라 이미 21일에 성을 버리고 영변 철옹성으로 피하였다. 태천을 점령한 봉기군의 수는 300명에 가까웠다. 태천이 점령된 후 좌수 김윤해, 중군 박인식, 진무 변대익 등이 박천의 봉기군 본대로 찾아가 인사하였고 그 중에 변대익이 留陣將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김사용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진격하였던 봉기군의 활동은 18일 저녁에 곽산과 선천의 중간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문이 민간에 퍼져있음을 탐지한 선천부사 김익순은 18일 소문의 근원인 崔奉觀을 심문하여 김창시·鄭復一·朴聖信 등의 모의를 확인하였다. 그는 곽산으로 포교를 보내 박성신과 張弘益을 체포하여 선천으로 압송하게 하였다. 김창시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으나 그는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김사용은 張浩益과 朴仁福·李成宗 등을 지휘하여 포교들을 죽이고 박성신 등을 구출한 후 곽산으로 진격하였다. 이 때 박성신 등은 가산의 본대로 가서 합류하고자 했으나 김사용은 독자적으로 곽산을 점령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수십 명의 인원으로 19일 새벽에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곽산을 점령하였다. 군수 이영식은 벽장 속에 숨었다가 옥에 갇혔으나 그 읍의 장교인 張再興의 도움으로 정주성으로 도주하였다. 김사용은 박성신을 곽산의 주관장으로 삼고 300명 내지 400명의 군사력을 모았다.533)
김사용은 곽산에서 이틀을 머문 후 정주로 갔다. 정주성에서는 그 전부터 난리가 난다는 소문이 돌아, 17일 저녁에는 목사 李近冑가 내응자 鄭眞僑 등을 체포해 옥에 가뒀다. 다음날에 崔爾崙 등이 옥문을 깨고 갇힌 자들을 구해내자 목사가 인민을 모아 변란에 대비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정주목사 이근주는 단신으로 탈출하여 안주 병영으로 피신하였다. 김사용은 21일에 내응자들의 영접을 받으며 수백 명의 인원으로 정주에 들어갔다. 이 때에는 내응을 약속한 관속들뿐 아니라 황주 출신의 申德觀, 재령 출신 金石河, 영변의 金雲龍과 같이 다른 지역에서 온 장사들도 박천지역의 본대로부터 파견되어 김사용 휘하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북진군 선봉장인 이제초 역시 정주 점령 때부터 김사용과 함께 활동하였다. 김사용은 최이륜을 정주 주관장으로 임명하고, 그 밖에 정주의 유력가들을 각자 알맞은 위치에 조직적으로 임명하였다. 첨사를 지낸 黃宗大를 좌익장으로, 동림별장을 지낸 李尙恒을 우익장으로 삼았으며, 기타 좌수·풍헌·집사 이하 관속과 전임자들을 모아 군관·별장·천총·파총·집사·별무사 등의 직책을 새로 주거나 자기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면서 봉기에 가담시켰다. 약국을 하는 金大勛은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봉기군은 정주 점령 이후부터 각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社倉穀을 군량으로 쓰면서 행정체계를 이용한 모군활동을 활발히 벌여 500여 명을 모았다. 이처럼 관속들을 재임명함으로써 봉기군의 행정체계를 정비하고 군량을 확보하면서 군사력을 모으는 활동은 이후 북진군이 각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마찬가지로 반복되었다. 특히 각 지역의 유식자들을 동원하여 從事官으로 임명하여 자신을 수행하도록 한 것은 남진군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23일에는 金履大를 정주도독(주관장)으로 삼았고, 최이륜을 참모로 바꿨다.
북진군은 24일 아침 정주를 떠나 곽산을 거쳐 미리 우영장과 좌영장에 임명한 최봉관과 劉文濟의 영접을 받으며 그날 저녁 선천에 입성하였다. 김사용은 그들을 각각 선천부사와 방어사로 새로 임명하였다. 향인 桂亨大를 軍糧監으로 임명하고, 인근 東林의 鎭將에는 집사를 지낸 高宗德의 아버지인 高中起를, 宣沙鎭 僉使에는 장교이면서 상인인 崔奉一을 임명하였다. 검산산성으로 피신하였던 선천부사 김익순은 격문을 보낸 봉기군에 25일 항복해왔다. 여기서는 정주읍의 大商 金若河와 선천인 梁致漢의 비단을 징발하여 김사용 이하의 군복을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북진군은 28일 일부가 구성으로 출진하였다. 황해도에서 온 장사 밑에 정주에서 온 별무사 韓處權·金致呂·鄭相云·李宗旬 등이 지휘부를 이루었는데, 군대의 수는 보군 240여 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일단 구성부 밖 30리의 남창에 머무르면서 곡식을 꺼내 기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지역의 鄕族 許瑀가 봉기군 진영과 내통하면서 민인들을 지휘하여 그 지역민 600명 내지 1, 000명에 달하는 인원을 봉기군에 가담시켜 큰 세력을 이루었다.534) 봉기군은 구성부에 격문을 띄워 협박하였으나, 부사 趙恩錫은 저항을 계속하였다.
북진군의 본대는 정주·곽산·선천 3읍의 보군 1, 200명과 기병 80명의 군사력으로 철산으로 진격하였다. 그곳에서는 이미 23일에 좌수 鄭大成, 중군 盧啓龍, 칙감 金元大 등이 雲巖山城으로 피신하려는 부사 李章謙을 잡아 위협하고, 田案監 吳仁錄이 항서를 써서 부사의 항복을 받아내어 대원수 홍경래에게 수령의 印符를 바친 상태였다. 북진군은 28일에 철산에도 무혈입성하였는데, 철산의 장교 鄭復一이 내응하여 고을을 장악하고 있었다. 김사용은 여러 차례 수령을 역임한 내응자 鄭敬行을 淸北都指揮使에, 그리고 정복일을 철산유진장에 임명하고, 그 지휘 아래에 있던 金益明을 西林鎭將에 임명하였다.
순조 12년(1812) 정월 3일에는 용천부사 權琇가 지키고 있는 龍骨山城을 공격하였는데, 부사가 의주로 도주함으로써 봉기군은 쉽사리 龍川을 점령하였다. 여기서는 鄭聖翰을 용천부사로 임명하였고, 청북도지휘사 정경행과 김사용 등의 지휘부는 良策站에 주둔하였다. 용천과 양책참의 봉기군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신도첨사 柳載河는 항복하였고, 철산의 鄕人으로 좌수를 역임한 張漢羽를 彌串鎭將으로 삼았다. 봉기군은 이곳에서 의주 공략에 열중하여, 정월 8일에는 종사관들을 모아 의주 점령의 묘책을 써내도록 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의 봉기 소식은 다른 지역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봉기지역에서 상당히 떨어진 中和에서도 향촌의 여러 지휘자가 각기 수백 명의 무장한 무리를 모아 스스로 元帥를 칭할 정도로 조직을 갖추어 활동하였다. 그들은 面任·里任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국가의 징병에 대해서는 “이러한 때에 어찌 관의 傳令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공개적으로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중화만의 특수한 사례는 아니었다. 해서지방도 홍경래 난이 일어나자 곳곳에서 ‘亂民’들이 무리를 모아 일어난 까닭에, 병력을 동원하라는 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단속하느라 지방군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서울에서는 봉기소식이 들려오자 현직 관리들까지 가족을 피난시키느라 경황이 없었다.535)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을 대상으로 ‘난민이 당을 이루어 약탈하는 행위’를 경계하는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536) 이와 같은 ‘난민’들의 저항행위는 실제 봉기지역에서는 더욱 활발하게 터져나왔다. 봉기군과는 별도로, 영변·태천 지역에서 明龍云·韓宅彬이라는 인물이 무리를 모아 침탈 행위를 하다 잡혀 효수된 것도 그 한 예이다. 이처럼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 어느 때라도 빈궁한 무리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은 읍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봉기군이 들어갈 염려가 없는 곳에 대해서도 각별히 주의할 것을 지시해야 하는 형편이었다.537)
529) | 鶴園裕, 앞의 글(≪傳統時代의 民衆運動≫), 263∼266쪽 참조. 吳洙彰, 앞의 글(1992), 172∼17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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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 | 12월 20일 봉기계획에 대해서는 앞의 우군칙 공초 외에도≪關西平亂錄≫4, 임신 2월 26일, 328쪽 및≪關西平亂錄≫5, 임신 3월 13일, 111쪽 참조. |
531) | 봉기후의 전개과정에 대한 전체적인 상황은 鄭奭鍾의 앞의 글(1972) 참조. |
532) | ≪關西平亂錄≫3, 임신 2월 8일, 606쪽. |
533) | 박성신 등의 체포와 구출 경위는 鄭奭鍾의 앞의 글(1972), 168∼169쪽 참조. 김사용의 곽산 점령에 대해서는≪關西平亂錄≫5, 임신 8월 15일, 467쪽 참조. |
534) | ≪關西平亂錄≫4, 임신 정월 14일, 133쪽. |
535) | 鄭奭鍾, 앞의 글(1972), 179쪽. |
536) | ≪純祖實錄≫권 15, 순조 12년 정월 정유. |
537) |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吳洙彰의 앞의 글(1992), 170∼172쪽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