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진압군의 정비 및 송림·사송야 전투
중앙정부에서는 12월 20일에 평안병사 이해우의 밀계를 통해 가산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접했다. 이어 22일에는 군수 정시가 잡혀 죽었으며, 안주 병영에서 3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박천 진두에 진을 쳤다는 보고가 계속되자 그날로 申鴻周를 정주목사로, 鄭周誠을 가산군수로 임명하고 이들에게 전투와 募軍을 편한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 동안 안주에서는 19일 아침 난리 소식으로 민간이 소란하자 목사 趙鍾永이 군대를 모으고 성문을 닫아 걸었다. 그 후로도 민인이 소문을 듣고 도주함으로써 병사의 소집은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일단 성을 튼튼히 지킬 수 있게 됨으로써 안주는 이후 진압군의 가장 중요한 반격의 거점이 되었다. 평안감사 李晩秀는 순안현 壯十部軍 2초를 발하여 안주를 구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23일에는 금광의 광부들이 난을 일으킨 것으로 파악한 비변사의 건의에 따라 금광 채굴을 금하지 못한 죄로 운산군수 韓象黙을 파직 추고하도록 하였고 그 후임에 白慶楷를 임명하였으며, 鄭晩錫을 關西慰撫使로 삼아 監賑使를 겸하게 하였다. 또 도주한 곽산군수 이영식 대신 정경행을 군수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이미 봉기군에 가담하고 있었지만 정부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또 전날 임명한 정주목사 신홍주를 영변부사로 옮기고 徐春輔를 정주목사로 삼았다. 자산부사 申在明이 휴가로 서울에 왔다가 병을 칭탁하고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남양부사 金處漢을 자산부사로 삼았으며, 선천부사에 金爔, 개천군수에 柳相弼, 박천군수에는 李運植을 각각 임명하였다. 이들 수령들은 진압군을 모으는 召募使를 겸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감사와 병사 이하 관서의 관속과 士民들에게 유문을 내려 봉기군을 소탕할 것을 당부하면서 적괴를 잡아 바치는 자에게 천금의 상금과 수령의 직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였다.
24일에는 관서의 군대만으로는 봉기군을 진압하기 어려우니 서울의 군대를 동원해야 하리라는 의견에 따라 兩西巡撫營을 금위영에 설치하였다. 李堯憲을 양서순무사로 임명하고, 절도사 이하 모든 장령에 대해 먼저 참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巡撫中軍에는 朴基豊, 종사관에는 徐能輔·金啓溫 등을 임명하였다. 이 때의 계획은 27일에 보군 7초를 출정시킨다는 것이었다.
26일 안주목사에 趙鍾永 대신 申大偀, 서흥부사에 金喆淳 대신 李宗爀을 임명하였다. 순무영의 군졸 중 240명을 자원자로 모집하려 했으나 겨우 70∼80명의 인원만이 자원하였다. 그러나 안주가 안정된 데에 힘입어 순무사의 출동은 뒤로 미루고 예정 병력 중 일부만을 먼저 파견하기로 하여, 27일에 좌별장 김처한으로 하여금 京軍 3초와 開城軍 1초를 이끌고 출동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처한이 출동을 거부하자 군문효수하기로 하고 중군 박기풍을 순무영 좌별장으로 삼아 출정시켰다.
이러는 사이에 평안도 지역의 정부군도 군세를 정리해 갔다. 27일경에 안주 병영에서는 9초의 군사를 동원해 병영 우후 李海昇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고, 함종부사 尹郁烈, 순천군수 吳致壽 등 인근 수령들도 진압활동에 가담시켰다. 평안감영의 중군 李鼎會가 5초의 군사를 이끌고 병영군에 합세하였다. 영변의 약산산성은 영변부사 吳淵常을 중심으로 운산·개천·태천의 수령들이 모여 굳게 지키고 있었다. 또한 봉기군이 숙천에서 영유·용강을 거쳐 삼화로 들어가면 安岳을 거쳐 바로 서울로 통하게 됨에 유의하여 삼화부사 金煐과 용강현령 申在業으로 하여금 그 길을 지키게 하고, 더 넓게는 봉기가 황해도와 함경도로 번져나가거나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상원·삼등과 성천·양덕의 수령에게 요해처를 잘 지키도록 조치하였다. 이즈음 평양에서는 유생과 무사들이 스스로 진압군을 구성하여 수백 명의 지망자가 모이고 있었다.
이처럼 진압군은 비교적 신속하게 전열을 정비하여 진압에 나설 차비를 갖추어 나갔다. 그리하여 진압군과 봉기군간의 최초의 본격적인 결전은 29일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안주를 바라보는 박천의 松林里에서 벌어졌다. 송림리에는 그보다 먼저 24일에 선봉장 홍총각의 부대 300여 명이 진을 쳤고, 26일 저녁에는 홍경래·김창시·우군칙 등이 500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였다. 봉기군은 각지의 농민들이 합세하여 많으면 수천 명, 적어도 1,000명 이상의 병력이 모였다. 여기에는 강제적으로 동원된 병력도 포함되었으나 대개 기민들로 구성되었다. 한편 관군은 숙천·중화·순천·함종·덕천·영유·증산·순안 등지의 군졸을 모아 이룬 2,000여 명의 병력이었으며, 그 중 9초가 전투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봉기군은 세 갈래로 진를 이루어 관군을 맞았다. 그 중 홍총각이 이끄는 선봉대가 우후 이해승이 이끄는 진압군 본대를 공격하였다. 관군은 좌영장 함종부사 윤욱렬과 우영장 순천군수 오치수가 西陣과 東陣을 이루었다. 봉기군은 관군의 중앙을 돌파하려 했으나, 안주성 백상루에 올라 전투를 지휘하는 평안병사 이해우의 지시에 따라 전곽산군수 이영식이 이끄는 1,000여 명의 후원군이 쳐나오고 봉기군 기병 3∼4명이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는 속에 접전이 계속되자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관군은 여기서 봉기군 200명 또는 수백 명을 목베고 30여 명을 사로잡았다. 봉기군의 장수도 4∼5명이 희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경래를 중심으로 한 봉기군 본대는 송림에서 패한 후 29일 밤에 정주성으로 들어갔다. 관군은 봉기군을 뒤쫓아 가산·박천을 수복하면서 다복동의 봉기군 기지를 불태움은 물론 연도의 민간인을 도륙하고 약탈하였다. 이 때 관군의 초토전술은 정부 안에서도 두고두고 논란이 될 정도로 극심하였다. 홍경래를 비롯한 봉기군 지휘부는 패주하느라 경황이 없는 중에도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정주에 끌고 들어감으로써 관군의 학살에서 그들을 구하고 항거의 기반을 튼튼히 하려고 하였다.538) 그리하여 가산·박천의 주민들이 대거 봉기군과 함께 정주성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북진군 중 구성의 남창에 모여 구성 공략을 준비하던 600∼700명의 봉기군은 송림 본대의 패전 소식을 듣고 12월 30일에서 다음해 정월 초하루 사이에 흩어졌고, 그 주력은 정주성으로 들어가 합세하였다. 태천을 점령하고 있던 봉기군은 영변 장교의 습격을 받아 中軍을 맡아보던 박인식 등 그곳 지휘자 5, 6명이 체포되어 효수되었다. 이어 6일에는 영변부사 오연상이 이끄는 진압군 300명의 습격으로 읍을 제압당하고 유진장 변대익도 체포되었다. 유진장 박성신이 지키고 있던 곽산에서도 정월 8일 후원장 이영식과 우영장 오치수가 이끄는 진압군의 공격을 받아 패주하였다.
박성신이 선천에 가서 정부군의 북진을 알리고, 9일에는 정주성에서 김창시가 와서 진압군과 싸울 것을 권하자 그곳에 머물고 있던 이제초가 기병과 보병 1, 000명을 이끌고 곽산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정월 10일 곽산의 四松野에서 곽산 주둔군과 좌영장 윤욱렬이 이끄는 관군의 선제공격을 받아 수백의 봉기군이 전사하는 희생을 낳고 흩어지고 말았다. 지휘자인 이제초는 사로잡혀 바로 처형당하였고, 김창시는 북쪽으로 피신하다 김사용의 종사관을 맡았던 趙文亨에게 배신당하여 목이 잘렸다. 이 곽산 사송야에서의 패배는 북진군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다. 관군은 이어 15일에 선천을 쉽게 점령하였다.
한편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 본대는 용천을 점령한 후 良策站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의주에서는 봉기군에 의해 감영·병영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있었지만, 계엄령을 내려 성내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특히 김견신과 허항이 ‘의병’을 일으켜 백마산성을 지키면서 봉기군에 대항하였다. 그들은 정월 10일 밤 용천을 점령하고 봉기군 26명을 처형하였으나 귀로가 끊길 것을 우려하여 다음날 일단 所串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날로 다시 진격하여 양책참을 점령하였다. 그보다 앞서 양책참에서 東林城으로 퇴각한 김사용은 곽산에서 이제초가 패한 후 정월 13일 1,000여 명의 군졸들에게 그곳의 군량을 나누어 가지게 한 후 장홍익·김대훈 등과 더불어 정주성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의주 점령을 목표로 진격했던 북진군 지휘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14일에는 金益明이 이끄는 西林城의 봉기군이 김견신 등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주하였다. 진압군은 여세를 몰아 16일에는 철산도 수복하였다. 운암산성과 동림성 등에 남아 있던 봉기군 일부도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538) | 吳洙彰, 앞의 글(1992), 154∼155쪽 참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