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1. 강화도조약과 개항1) 조약체결 전의 국내외정세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1.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 1) 한·중·일의 정세
            • (1) 화이사상과 중국의 조공제도
            • (2) 조선왕조와 청조:청한 종속관계
            • (3) 조선왕조와 일본:‘교린’관계
            • (4) 화이질서하의 한국과 일본
          • 2) 서세 동점과 동아시아 제국
            • (1) 서방제국의 동방진출
            • (2)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동방진출
            • (3) 일항 무역:전통적 동서무역 제도
            • (4) 화란과 영국의 진출
            • (5) 중영 무역의 변천:차에서 아편으로
          • 3) 동서 신국제관계의 성립:불평등조약 체제
            • (1) 중영 아편무역 분쟁
            • (2) 중영 개전과 남경조약의 체결
            • (3) 애로우전쟁과 천진조약 및 북경협정
          • 4) 일본의 개항과 미국
        • 2. 구미 열강의 통상요구
          • 1) 러시아의 통상요구
          • 2) 프랑스의 통상요구
          • 3) 영국의 통상요구
          • 4) 미국의 통상요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1. 개화사상의 형성
          • 1) 개화사상의 형성과 배경
          • 2) 개화사상의 형성
          • 3) 1866년 개화사상 비조들의 활동
          • 4) 최초의 개화사상
        • 2. 동학의 창도와 동학사상
          • 1) 동학 창도의 배경
          • 2) 동학의 창도 과정
          • 3) 동학사상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1. 흥선대원군의 집권
        • 2. 대원군의 내정 개혁
          • 1) 대원군의 인재등용
          • 2)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 3) 재정, 군사제도의 개혁
          • 4) 민란 대책
        • 3. 대원군의 대외정책
          • 1) 러시아의 남하 방어책
          • 2) 천주교 탄압:병인사옥
          • 3) 병인양요와 대응책
          • 4) 신미양요와 대응책
          • 5) 대일 강경책
        • 4. 대원군 정치의 성격과 의의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1. 강화도조약과 개항
          • 1) 조약체결 전의 국내외정세
            • (1)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조선정책
            • (2) 고종친정과 대외정책
          • 2) 강화도조약의 체결
            • (1) 운요호사건과 조선정부의 대응
            • (2) 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성격
          • 3)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대내외정책
            • (1) 수신사파견과 개화정책의 모색
            • (2) 조일수호조규 부록 및 통상장정
        • 2. 개항 초기의 조청관계
          • 1)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서양 각국과의 수교권고
          • 2) 제2차 수신사의 파견과 주일청국사절의 연미론
        • 3. 조미조약의 체결
          • 1) 조·청·미 3국의 조미조약 체결 교섭과 속방조관
          • 2) 조미조약의 성립과 속방조회
        • 4. 유럽 각국과의 조약체결
          • 1) 한·영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2) 한·독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3) 한·러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4) 한·불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5) 기타 유럽국가들과의 조약체결
        • 5. 개항의 역사적 의의
          • 1) 강화도조약과 자본주의 세계체제
          • 2) 불평등조약체제의 수립과 그 영향
          • 3) 초기 개화정책의 추진배경과 그 성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고종친정과 대외정책

 정한론을 둘러싼 메이지정부의 분열이 있은 지 약 한 달 후, 조선에서도 집권세력이 교체되는 큰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 고종은 1873년 10월 崔益鉉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익현은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현재 나라 일이 폐단 없는 곳이 없으니, 명분이 바르지 못한 것과 말의 순하지 못한 것을 글쓰는 사람을 번갈아 기록하더라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대원군의 치세 전반에 대해 총체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대표적인 실정의 사례로 만동묘철거, 서원폐쇄, 國賊의 伸寃, 청전의 사용 등을 들었다. 최익현은 상소의 끝에서 “친친의 열에 속한 사람은 다만 그 지위를 높히고, 나라 정사에는 간여하지 말도록 할 것”을 되풀이 하여 주장함으로써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였다.247) 고종은 최익현의 동부승지 사직상소를 물리침과 동시에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키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최익현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11월 15일과 16일 좌의정 姜㳣와 우의정 韓啓源, 영돈영사 洪淳穆 등 고위관료들이, 17일에는 호조·예조·공조·병조판서들이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나아가 성균관의 유생들이 이른바 捲堂(맹휴)으로 고위관료들의 최익현 규탄에 가담하였다. 이어 12월 16일에는 승정원의 구성원과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대간들이 동시에 사임함으로써 최익현상소를 둘러싼 정치문제는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위관료들의 반발에 부딪쳐 고종은 최익현을 일시 관직에서 해임하였으나, 최익현을 비판하는 세력들은 상소가 인륜을 그르치는 내용이라며 강경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마침내 11월 24일 의정부와 비변사의 상층관료 57명이 연명한 賓啓를 접하여 고종은 최익현에 대한 심리를 집행하라고 명령하여 이들의 반대를 수용하였으나, 동시에 최익현을 반대한 세 명의 하위관리에 대해서도 유배를 명령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248)

 의금부는 최익현을 대역죄로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으나, 고종은 최익현이 단지 시골의 몰지각한 인물에 불과하며 섭정 조대비가 최익현을 가볍게 처벌하라고 지시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제주도 유배를 명하였다. 승정원에서는 이 결정에 항의했으나, 고종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11월 28일 의금부의 주요 관리 중 홍순목·강로·한계원·金世均·朴珪壽 등은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고종은 홍순목·강로·한계원 등을 해임함으로써 자신의 결정을 공식화하였다. 결과적으로 최익현의 상소 이후 한 달여 안에 조정내 대원군 지지세력이 축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대원군의 실각 소식을 접한 일본정부도 즉각 外務6等 出仕 모리야마를 재차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 정정의 변화를 파악하도록 지시하였던 사실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다. 이 시기 정치세력의 교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대원군파 홍순목의 축출과 李裕元·박규수의 중용, 그리고 군사권의 장악이었다. 고종은 이와 같이 조정내 집권세력을 교체하고 1874년에 접어들면서 각지방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249)

 이 시기 암행어사 파견의 정치적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점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朴定陽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박정양의 주요 활동은 크게 경상도관찰사 金世鎬, 동래부사 鄭顯德, 왜학훈도 안동준 등 대일외교를 담당했던 관료들에 대한 조사와 다른 하나는 부산에 설치되어 있었던 왜관주재 일본관리와의 접촉이었다. 박정양 활동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신정권이 중앙과 지방에서 대원군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대외적으로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급속히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정부의 방침은 공식적인 접촉 또는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 그리고 지방세력들 사이에서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정부가 이 시기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던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일본의 대만침공에 관한 소식과 대만사태에 뒤이은 청국 자문의 영향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조선정부는 신임 왜학훈도 玄昔運에게 일본과의 교섭을 지시하였다. 1874년 9월 3일 현석운과 모리야마는 국교재개 문제에 대해 회담하였다. 이것은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 관리간에 이뤄진 최초의 공식회담이었다. 회의에서는 국교 재개를 위해 조선국 예조판서에게 일본 외무성의 외무경이 예조참판 앞으로, 또한 舊쓰시마번주가 예조참판에게 각각 새로 서계를 보낼 것을 합의하였다.

 모리야마는 10월 하순 東京에 도착하여 조선에 관한 상세히 보고를 하였다. 그는 일본정부가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조선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외무성은 그 건의를 채택하여 이미 결정되었던 舊쓰시마 번주의 파견을 철회하고, 12월에 가서 모리야마를 外務少丞으로 승진시킨 뒤 다시 부산에 파견하여 국교재개 교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대만문제를 성공적으로 종결지은 오쿠보 정권의 대외적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좀더 직접적인 요인은 상술한 바와 같이 대원군 실각 후 조선정부의 대일외교 변화를 틈탄 일본정부의 적극정책이라 할 것이다.250)

 앞의 합의에 따라 모리야마는 1875년 2월 하순에 부산에 도착하여 서계를 제출하고 현지 조선 당국자들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동래부의 보고에 대해 조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의가 진행되었다.

상이 이르기를, ‘올라온 서계를 끝까지 받아 보지 않는다면 자못 誠信의 도리가 아닌 듯하다. 또한 저 왜인이 받아 본 뒤에 만일 따르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비록 백 번을 물리치더라도 마땅히 도로 받아서 가겠다고 약조를 하였으니, 이번에는 가져와 보게 해서 실로 격식을 어긴 점이 있으면 다시 물리치는 것이 불가하지 않을 듯하다. …’ 김병국이 아뢰기를, ‘倭情이 본래 교활하니, 전의 말을 準據해 믿거나 서계에 眞書와 諺書가 서로 섞여 있는 것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만, 한번 자세히 살펴본 뒤에 과연 격식에 어긋난 점이 있으면 사리에 의거해 물리치는 것이 실로 일의 체모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狀啓가 올라온 지 이미 여러 날 되었으니 즉시 품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인의 실정은 별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겠다’(≪承政院日記≫, 고종 12년 2월 5일).

이용우가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 ‘彼國의 官制가 변경되었다고 핑계대고는 있지만 도서를 만들어 주는 것은 서로 믿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바꿀 수 없는 법규가 되었는데, 당초 두 나라가 講定하지도 않고 이제 와서 새로 행하고자 한단 말입니까. 비록 노인으로 말한다 해도 정식을 고치는 것 또한 격식에 어긋나는 것이니 모두 좋은 말로 효유하여 다시는 시끄럽게 하지 말도록 하고 형세를 속히 馳聞하도록 알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承政院日記≫, 고종 12년 2월 9일).

 위의 기록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대략 두 가지 입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는 전통적인 조일외교의 형식을 주장하며 이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서계의 접수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1868년 서계접수 거부 시기의 논의와 다른 점은 외교문서를 일단은 접수하여 검토해보자는 입장이 새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이와 같이 서계를 접수하여 적극적으로 대일외교를 풀어가자는 입장의 선두에 고종이 있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고종은 서계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서계접수 자체의 거부는 “誠信에 어긋난다”, “왜인의 실정은 별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겠다”, “이번의 서계는 개수한 곳이 있다”라고 함으로써 서계 접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의정부 대신 이용우와 시원임대신들은 고종의 태도와 달리 동래부 장계의 회답을 지연시키고 있었고, 여전히 ‘皇’·‘大’ 등의 용어와 新印의 사용 등을 들어 거부하고 있었다. 고종은 개인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분명히 하였으나, 조정대신들의 여론은 여전히 서계 접수를 거부하는 쪽이 다수였다고 하겠다.

247)李瑄根, 앞의 책, 338∼340쪽.
248)James B. Palais, 李勛相 譯,≪傳統韓國의 政治와 政策≫(신원문화사, 1993), 295∼332쪽.
249)한철호,<고종 친정초(1874) 암행어사 파견과 그 활동>(≪사학지≫31, 1998), 193∼244쪽.
250)金基赫, 앞의 글, 25∼26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