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대내외정책
(1) 수신사파견과 개화정책의 모색
조선정부는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한 일본의 강압적인 요구와 청국의 권고, 일본과의 무력분쟁을 피하자는 조선정부의 판단으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 조선정부의 당면 과제는 대내적으로 개항반대세력의 저항을 흡수하고, 개항에 뒤따르는 대외적인 상황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조약 체결 이후 정부가 당면하였던 정치적 과제는 조약체결에 대한 재야로부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고종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조약체결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왜인이 와서 이미 수호라 하였으니, 우리 나라도 수호로 대접해야 할 뿐이고, 먼저 범하지 않고 말썽의 꼬투리를 열지 않는다는 조정의 의논도 우리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일 뿐인데, 어찌 도리에 어그러진 상소가 번갈아 나와 문득 화의를 주장하고 양인과 통한다는 말로 거짓을 날조하여 조정 관원을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을 하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화의를 주장한다는 것은 본디 그럴 듯 하지 않으니 바로 도리에 어그러진 상소가 터무니없이 속이는 것이고, 양인과 통한다는 것은 더욱이 영향이 없으니 곧 도리에 어그러진 상소가 거짓말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신은 변변치 못한 자질로 이 직임을 무릅쓰고 차지하여 평소에도 이미 믿음을 받지 못하였거니와 일을 당하여서도 鎭服하였으므로 저들이 상소하여 현혹하고 무함하는 것이 모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이 태연히 자리를 차지하여 있으려 하더라도 백관을 감독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왜선이 물러갔고 정부의 회좌를 막 철폐하였는데 어전의 인견을 받게 되었으므로,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감히 아룁니다. 바라건대, 聖明은 신들의 위구한 심정을 굽어살피어 빨리 물리쳐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일은 구호를 닦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경들의 조처가 마땅하였으므로 무사히 타결되었거니와, 이제 협잡하는 상소 때문에 남의 구설이라 하여 뒤미쳐 인책할 꼬투리로 삼는다면, 어찌 아주 뜻밖이 아니겠으며 또한 도리어 나라의 체면을 손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는 이 때문에 서로 말하지 않기를 매우 바란다’고 하였다(≪承政院日記≫, 고종 13년 2월 5일).
일본의 무력 시위 하에 체결되었던 조약에 대하여 개항반대론자들의 공세가 시원임대신들에 대한 정치적인 공세로 나아가자 고종은 조약체결의 명분으로 “이번 일은 구호를 닦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경들의 조처가 마땅하였으므로 무사히 타결”되었다고 옹호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의 개항론을 최익현의 이른바 ‘왜양일체론’과 비교해보면 왜와 양을 분리하고, 일본과의 조약체결을 전통적인 관계의 연장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집권층의 조약에 대한 인식은 결과적으로 조일수호조규의 실질적인 내용과 성격과는 달리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개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교린체제의 연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조일수호조규 조인 이후 일본의 조선정책은 비록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강화도조약에서 규정하였던 후속조처, 예를 들면 通商章程 체결, 외교사절의 서울 常駐, 開港場 확대(부산 이외 2개항의 개항) 문제 등의 해결없는 조약체결은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들은 일본정부가 明治政府 성립 직후부터 줄곧 추진해 왔던 조선정책의 역사적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쉽사리 해결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본정부가 조·일간에 가로놓인 산적한 문제들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조선의 집권세력으로 하여금 일본과의 교류 확대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정부가 조약체결과 동시에 취한 정책은 조선정부의 집권관료 및 유력인사들의 일본방문과 시찰, 유학을 적극적으로 유도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집권세력들로 하여금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정책의 성과물들을 보여주고, 이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의 확산을 통해 일본의 조선 진출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강화도조약의 조인식 직후 개최된 연회석상에서 일본측 전권대신 쿠로다 기요타가는 조선측 대관 申櫶에게 인사말을 마친 다음과 같이 조선측 인사의 일본 시찰을 권고하였다.
대저 交隣之道는 風俗을 詳察한 연후에야 가히 의혹을 타파할 수 있을지니, 비록 細目協定을 보기 전이라 하더라도 貴國에서 먼저 한 사람을 보내어 물정을 詳察한다면 아국이 今次의 조약을 위하여 얼마나 心力을 허비하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며 의심도 풀릴 것이요, 따라서 細目講定시에 도움이 될 것 같다. 從此 이후로는 귀국 使臣의 내왕도 매우 편할 것이니, 火輪船을 이용한다면 부산에서 도쿄까지 6, 7일이면 도달할 수 있다. 귀국에서 속히 使臣을 派送해 준다면 我國人民도 십분 믿음이 더해지고 귀국으로도 매우 좋을 듯하다.259)
일본측 전권대신 일행이 귀환한 후 잔무처리를 위해 강화도에 체류하였던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 또는 미야모토 오카즈)·노무라 야수시(野村靖) 일행도 신헌과 윤자승에게 향후 6개월 이내에 사신을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260)
이러한 일본정부의 초청에 그동안 서계문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일외교에 소극적이었던 조선정부는 대단히 이례적이라고 판단될 정도로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고종은 신헌이 조약을 체결하고 조정에 돌아와 보고하는 자리에서 그간의 경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의 배가 다 물러갔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당초에 安危에 관계되는 것이 있었는데 이제 물러갔으니, 참으로 국가의 큰 복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問答狀啓를 보니, 과연 말을 잘하였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다행히 임금의 영위에 의지하고 묘당의 계책에 힘입어 명을 욕되게 하는 것을 면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노고를 내가 안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온화한 말씀을 이토록 하시니 황송하고 또 감동하여 마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계한 것 밖에도 만나서 수작한 것 중에서 아뢸 만한 것이 또 있는가. 상세히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承政院日記≫, 고종 13년 2월 6일).
신헌은 복명하는 자리에서 조약체결 중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조약비준과 관련하여 일본이 임금의 이름을 기명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여 반영했던 점과 일본측 교섭관련자들에 대한 평가 등을 주로 보고하였다. 한편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정황에 대해 고종이 질의를 덧붙였다. 고종은 신헌의 복명 가운데 일본측 무기의 우수함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을 덧붙이고 있다.
상이 이르기를, ‘또 들은 것이 있는가’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흑전청륭의 말은 여섯달 안에 곧 사신을 보내어 한편으로 회답사례하고 한편으로 그 풍속을 알아보고 한련으로 유람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부산에서 적간관의 화륜선을 타고 적간관에서 동경까지는 7, 8일에 곧 다다를 수 있으므로 별로 노고가 없다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이는 통신사인가’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품질의 상례에 구해하지 말고 다만 일을 아는 사람을 보내라 합니다. 이제부터 피아의 사신은 모두 예폐를 없애고 저곳에 가면 방세를 주고서 거처하고 밥을 사서 먹으니, 이것은 통신사와 같지 않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 ‘저들이 말하기를 지금 천하의 각국이 군사를 쓰는 때를 당하여 귀국의 산천이 매우 험한 것으로는 싸우고 지키기에 넉넉하나 군비가 매우 허술하다, 하며 부국강병의 방법을 누누이 말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교린하는 성심에서 나온 듯 하다. 우리 나라는 군사의 수효가 매우 모자란다’하였다(≪承政院日記≫, 고종 13년 2월 6일).
고종은 신헌의 교섭과정에 대한 보고에서 일본측 사절단의 인사들에 대한 평가와 일본의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상황에 대한 관심 가운데 무기와 군대양성에 대하여 집중적인 관심을 표명하였다. 또한 일본측 사신 파견에 대한 요청이 있었다고 보고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접때 일본 使船이 온 것은 오로지 修好 때문이니 우리가 善隣하는 뜻에서도 이번에는 사신을 專委하여 修信해야겠습니다. 사신의 호칭은 수신사라 하고 응교 김기수를 특별히 가자하여 차출하되 해조를 시켜 구전으로 단부하고 따라가는 인원은 일을 아는 자로 적당히 가려서 보내되, 이는 수호한 뒤에 처음 있는 일이니, 이번에는 특별히 당상관을 시켜 書契를 가지고 들어가게 하고, 이 뒤로는 서계를 전례대로 東來府에 내려 보내어 에도(江戶)로 옮겨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承政院日記≫, 고종 13년 2월 22일).
일본의 전권대신들이 구호중수를 위해 왔으므로 이번에는 우리가 신의를 새롭게 한다는 뜻에서 수신사를 임명하여, 수신과 함께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수신사 파견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쿠로다는 조선측의 사신 파견을 6개월 이내에 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정부는 일본의 예상을 뒤엎고 즉각적으로 이에 응했다. 이와 같은 대응 태도는 조선정부가 대외정세의 변동에 대해 그만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정부가 조약체결 직후 곧 바로 수신사를 파견하기로 했던 것은 메이지유신 후 일본 국내의 ‘物情詳探’이 목적이었다. 고종의 지시를 받은 수신사 일행이 도쿄에 체재하는 동안 보인 일련의 행동들은 일본 국내 물정 가운데 조선정부의 관심이 군사시설과 군사력에 있었음을 보여준다.261)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추이에 대한 조선정부의 관심과 위기의식은 이미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 전권대관 신헌의 다음과 같은 보고에서도 확인되고 있었다.
지금 천하의 대세를 보건대, 각국에서 무력을 사용하였고 앞뒤로 수모를 받은 것도 벌써 여러 차례나 됩니다. 병력이 이와 같다는 것이 만일 각국에 전파되면 신이 모르긴 하겠지만 그들의 멸시가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정말 몹시 걱정이 됩니다(≪承政院日記≫, 고종 13년 2월 6일).
고종을 비롯한 조선정부 집권층의 이러한 위기감은 현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5년을 주기로 서양 열강의 거듭된 침략전쟁을 겪었고, 일본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결국 개항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정부가 군사력 강화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절실한 문제가 자위력을 갖추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군사력 증강정책은 1880년을 전후하여 추진되었던 조선정부의 일련의 개화정책과 맞물리면서 구체화되었다.262) 이와 같이 개항 이후 조선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근대적인 외교관계로 전환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대외정책의 변경을 부인함으로써 개항과 동시에 시도되어야 했던 체제의 정비가 지연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국내체제의 정비는 1880년 말을 전후하여 비로소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정부는 1880년 12월 청국의 총리아문을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 이래, 1881년 전반기에 영선사와 조사시찰단을 각각 청국과 일본에 파견하였고, 별기군을 창설하는 등 근대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대내적인 체제 정비와 아울러 1880년 이후 조선정부는 대외정책 면에서도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추구하였다. 조선정부의 대외적극정책은 청국 양무파 정권의 권유 및 미국의 조선진출 노력과 맞물려 결실(조미수호조규, 1882년)을 맺게 되었다. 조미수호조규 체결 이후 조선은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 등과 차례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완전히 개방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대외정책 방향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던 영국과 청국의 대한반도 정책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려는 데 대해 국내에서는 개항 이후 잠복해 있었던 개항반대세력의 상소가 줄을 이었으나 조선정부의 개방정책은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259) | 李瑄根, 앞의 책, 401∼40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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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 ≪日省錄≫고종 13년 2월 6일. 田保橋潔, 앞의 책, 상, 558쪽. |
261) | 이와 같은 사실은 6월 1일 金綺秀의 복명관련 기사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고종과 김기수의 대화 내용 중 상당부분은 일본의 군수산업, 군비증강 정책의 실상에 관한 것이었고, 그 외 러시아와 미국을 비롯하여 조선을 둘러싼 서양열강의 형세에 관한 것을 묻고 있었다(金綺秀,≪修信使日記≫권1, 고종 13년 6월 및 국사편찬위원회,≪修信使記錄≫, 29∼130쪽 참조). |
262) | 조선정부의 軍備强化政策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근대적인 무기체제를 외국으로부터 도입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대조직을 근대적인 체제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단기간 내에 근대적인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못했던 조선정부는 해외로부터 군장비를 도입하고, 근대적인 군사지식을 갖춘 외국인에 의한 군대양성을 정책의 대강으로 삼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