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2. 개항 초기의 조청관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1.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 1) 한·중·일의 정세
            • (1) 화이사상과 중국의 조공제도
            • (2) 조선왕조와 청조:청한 종속관계
            • (3) 조선왕조와 일본:‘교린’관계
            • (4) 화이질서하의 한국과 일본
          • 2) 서세 동점과 동아시아 제국
            • (1) 서방제국의 동방진출
            • (2)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동방진출
            • (3) 일항 무역:전통적 동서무역 제도
            • (4) 화란과 영국의 진출
            • (5) 중영 무역의 변천:차에서 아편으로
          • 3) 동서 신국제관계의 성립:불평등조약 체제
            • (1) 중영 아편무역 분쟁
            • (2) 중영 개전과 남경조약의 체결
            • (3) 애로우전쟁과 천진조약 및 북경협정
          • 4) 일본의 개항과 미국
        • 2. 구미 열강의 통상요구
          • 1) 러시아의 통상요구
          • 2) 프랑스의 통상요구
          • 3) 영국의 통상요구
          • 4) 미국의 통상요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1. 개화사상의 형성
          • 1) 개화사상의 형성과 배경
          • 2) 개화사상의 형성
          • 3) 1866년 개화사상 비조들의 활동
          • 4) 최초의 개화사상
        • 2. 동학의 창도와 동학사상
          • 1) 동학 창도의 배경
          • 2) 동학의 창도 과정
          • 3) 동학사상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1. 흥선대원군의 집권
        • 2. 대원군의 내정 개혁
          • 1) 대원군의 인재등용
          • 2)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 3) 재정, 군사제도의 개혁
          • 4) 민란 대책
        • 3. 대원군의 대외정책
          • 1) 러시아의 남하 방어책
          • 2) 천주교 탄압:병인사옥
          • 3) 병인양요와 대응책
          • 4) 신미양요와 대응책
          • 5) 대일 강경책
        • 4. 대원군 정치의 성격과 의의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1. 강화도조약과 개항
          • 1) 조약체결 전의 국내외정세
            • (1)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조선정책
            • (2) 고종친정과 대외정책
          • 2) 강화도조약의 체결
            • (1) 운요호사건과 조선정부의 대응
            • (2) 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성격
          • 3)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대내외정책
            • (1) 수신사파견과 개화정책의 모색
            • (2) 조일수호조규 부록 및 통상장정
        • 2. 개항 초기의 조청관계
          • 1)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서양 각국과의 수교권고
          • 2) 제2차 수신사의 파견과 주일청국사절의 연미론
        • 3. 조미조약의 체결
          • 1) 조·청·미 3국의 조미조약 체결 교섭과 속방조관
          • 2) 조미조약의 성립과 속방조회
        • 4. 유럽 각국과의 조약체결
          • 1) 한·영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2) 한·독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3) 한·러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4) 한·불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5) 기타 유럽국가들과의 조약체결
        • 5. 개항의 역사적 의의
          • 1) 강화도조약과 자본주의 세계체제
          • 2) 불평등조약체제의 수립과 그 영향
          • 3) 초기 개화정책의 추진배경과 그 성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개항 초기의 조청관계

1)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서양 각국과의 수교권고

 興宣大院君 李昰應(1820∼1898)을 하야시키는데(고종 10년:1873년 11월)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閔升鎬(1830∼1874), 閔奎鎬(1836∼1878), 趙寧夏(1845∼1884) 등이 중심이 된 척족세력이었다. 그러나 아직 정치적 식견이나 경험이 부족한 이들을 배후에서 도운 사람은 대원군의 정적인 전 좌의정 李裕元(1814∼1888)이었다. 그가 국왕 고종의 친정과 동시에 영의정으로 발탁된 것도 그런 논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265)

 국왕이나 국왕의 친정에 협력하고 있는 척족은 書契의 수리를 거부함으로써 야기된 고종 9년(1872) 이후의 조·일 양국 사이의 긴장, 즉 국교 중단사태를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원군이 취해 온 대일 강경정책을 수정하려고 하였다. 일본과 서계 수리문제를 타협함으로써 전통적인 交隣關係를 회복, 유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국외정세에 밝은 朴珪壽(1807∼1877)를 우의정에 임명한 것도(12월) 그러한 배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266)

 그러나 일본 국서의 수리, 즉 대일국교 조정문제는 선뜻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거기에는 전통적인 배일감정도 작용하였겠지만, 대원군의 위세가 廟堂을 지배하여 급격한 대일정책의 수정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나 척족은 청국의 지지를 얻어 묘당의 배일론을 깨트릴 것을 고려하게 되었고, 그러한 사명이 세자 책봉을 주청하기 위하여 청국으로 떠난(고종 12년 7월) 이유원에게 맡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유원은 이 무렵 영의정에서 물러나 領中樞府事로 있었다.267)

 奏請使 이유원은 북경에 도착하여(10월) 세자 책봉문제를 매듭짓는 한편 비밀리에 總理衙門 과원들과 대일국교 조정문제를 협의하였다. 또 귀국하는 길에 直隷 永平府에 들러 知府 游知開(?∼1898)와 면담하고, 그를 통하여 청국 외교를 이끌고 있는 北洋大臣 李鴻章(1823∼1901)에게 서함을 보내었다. 12월 13일자로 이홍장에게 전달된 이 서함에는 인사말 이상의 어떤 공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서함도 대일국교 조정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268)

 이유원의 서함을 받은 이홍장은 바로 다음 날인 14일자로 回函을 보내고 있다. 그는 이 회함에서 조일 양국간의 교섭이 어떠한지를 묻고, 청국이 ‘閉關自治’를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밝히고 있다. 비록 조선의 대일국교 조정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외교해야 한다는 뜻을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써 일본과의 국교가 필요하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269)

 주청사 이유원이 청국으로 떠난 직후 운요호(雲揚號)사건이 일어났고(고종 12년 8월), 그가 귀국 복명한 것은 일본이 전권을 江華府로 파견한다는 통고를 해오기 직전인 고종 12년 12월 중순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과의 국교가 필요하다는 이홍장의 회함도 도착되었을 것이다. 이 이유원의 복명이나 이홍장의 회함은 국왕이나 척족으로 하여금 그들이 추진하고 있는 대일국교 조정방침이 청국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운요호사건에 따른 일본과의 분규에도 유화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70)

 또 조일 양국대표가 강화부에서 회담하기 직전에 청국 禮部에서 보낸 咨文도 도착하였다(1876. 1). 운요호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森有禮(1847∼1889)를 주청공사에 임명, 북경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총리아문과 접촉을 갖고 조청간의 이른바 종속관계에 대하여 문의하는 한편, 일본은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여 운요호사건을 협의하고 수호조약도 체결할 뜻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에 청국 예부에서는 총리아문과 삼유례 사이에 왕복한 문서와 이에 대한 총리아문의 견해를 밝힌 上奏文 등 일건문서를 조선으로 보내왔던 것이다.271)

 이유원의 복명이나 이홍장의 회함을 통하여 조일국교문제에 관한 청국정부의 분위기를 짐작하고 있었던 국왕이나 척족은 이 자문을 통하여 일본이 요구하는 바가 수호조약 체결에 있으며, 청국은 이 조약의 성립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만큼 확인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유원의 복명, 이홍장의 회함과 함께 예부의 자문도 조선이 일본과의 수교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272)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청양국의 원로대신 이유원과 이홍장이 처음으로 서함을 주고 받은 것은 고종 12년(1875) 12월 중순이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조선이 대미수교방침을 청국측에 통보하는 고종 18년(1881) 초까지, 거의 매년 서함이 왕래되었다. 그리고 이홍장은 이 서함을 통하여 이유원, 즉 조선측에 “러시아인을 備禦하고 일본에 대응하는 방책에 대하여 늘 언급하였다”273)고 한다. 그 중에서도 우선 주목되는 것이 고종 14년 10월 15일자 이유원의 서함에 대한 회함으로 보내 온 고종 15년 9월 4일자 서함이 아닌가 한다.274)

 막료 薛福成(1838∼1894)을 시켜 작성한 이 서함에서, 이홍장은 ① 일본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분수를 깨닫기 시작하였으며, 러시아를 경계하여 조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것, ② 영·미 등 서양 여러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어 그 뜻이 통상에 있을 뿐 남의 토지를 탐내지 않는다는 것, ③ 그러나 러시아가 도모하는 바는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이에 대한 은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은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여야 하며, 이를 위하여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고 영·미와의 입약·통상도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275)

 청국의 당로자들은 江華島條約이 성립(1876)함으로써 운요호사건으로 빚어진 조일 양국 사이의 분규가 평화적으로 타결됨에 따라 일본의 조선 침략보다 러시아의 그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러시아는 운요호사건 이후 黑龍江 지역에 파병하여 남진할 형세를 보이고 있으며, 터어키와의 전쟁(露土戰爭, 1877∼1878)을 끝내는 대로 그 방향을 조선으로 옮길 것을 우려하였다. 이홍장의 이 서함은 바로 그러한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었다.276)

 이처럼 이홍장을 비롯한 청국의 당로자들이 조선을 둘러싼 동북아정세, 특히 일본과 러시아의 동정에 주의를 기울여 온 것은 조선의 안전이 東三省(滿洲)의 안전, 나아가 중국 본토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가령 임진왜란 때 明의 원군 파견 배경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1870년대로 들어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위협이 증대되고 여기에 러시아의 남하에 따른 불안이 곁들여져 그것이 한층 더 고조되었던 것이다.277)

 이 무렵 청국의 대러시아 관계는 伊犁((Ili, Kulja)문제로 악화되어 갔다. 러시아는 新疆省 일대를 휩쓴 회교도의 반란을 틈타 이 지역 북부의 요충인 이리를 강점하였었다(1871). 청국이 반란을 진압하는 대로 반환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반란이 진압되었음에도(1877)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청국은 사절을 러시아로 파견하여(1878) 다시 반환을 약속받았지만(Livadia조약, 1879), 그 내용은 청국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나라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278)

 청국이 이리 문제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인 고종 16년(1879) 2월에 일본은 그 틈을 타 돌연 琉球를 병합하였다. 이 사건은 이제까지 청국이 가지고 있었던 어느 정도의 확신을 동요시켜 일본이 머지않아 조선마저 병탄하리라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조선 병탄은 물론 청국의 안보와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였다. 이 사건은 자연 청국 당로자의 관심을 러시아로부터 일본으로 되돌리게 하였다.279)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국은 조선문제에 깊이 개입할 수가 없었다. 조선과 청국은 朝貢體制(tribute system)하에서 宗藩關係를 맺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청국은 전통적으로 조선의 ‘政敎 禁令’에 관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조선문제에 개입하고 나아가 그 안전을 책임질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280)

 이런 상황하에서 청국이 선택한 대책은 조선의 외정에 비공식적으로 간여하는 방식, 즉 이홍장으로 하여금 그와 서함을 왕래하여 온 이유원을 통하여 조선측에 서방 여러 나라와 입약 통상하도록 종용하는 것이었다. 조선을 이른바 條約體制(treaty system)에 편입시켜 한반도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이룩함으로써 일본이나 혹은 러시아의 침략에 대응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총리아문의 주청에 따른 것이었다.281)

 이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辦理臺灣等處海防大臣 沈葆楨(1820∼1879)의 프랑스인 고문 지켈(Giquel, Prosper Marie, 日意格, 1835∼1886)이었다. 그는 고종 11년(1874) 일본의 대만 출병에 즈음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을 경고하고 그 대책으로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 여러 나라와 입약 통상하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282)

 이어 이홍장도,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종 15년에 이유원에게 보내는 서함에서(9월 4일자)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론을 시사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총리아문의 주청에 따른 淸廷의 결정에 따라 조선에 대하여 입약 통상론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총리아문의 주청도 前福建巡撫 丁日昌(?∼1882)의 ‘海防事宜摺’(1879)과 주청영국공사 웨이드(Wade, Thomas F., 威安瑪, 1818∼1895)의 견해가 참작된 것이었다.283)

 이홍장이 청정의 결정에 따라 이유원에게 서함을 보내 온 것은 이해(1879) 7월 9일자로, 역시 막료 설복성을 시켜 작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유원에게 전달된 시기는 이해 8월 그믐께라는 견해도 있지만, 7월 그믐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서함은 비밀리에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을 권고하였다 하여 ‘密函’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李書’라고도 하였다.284)

 이홍장이 ‘이서’, 즉 ‘밀함’에서 권고한 요지는, 유구 병합으로 미루어 일본의 조선 침략이 임박하였으므로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입약 통상하여 일본을 견제하여야 하며, 그것은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備禦의 수단이 되리라는 것, 조선 스스로 武備를 密修하여 이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경우 그 자신이 적의 충고하겠다는 것도 덧붙이고 있다.285)

 이홍장의 밀함에 대한 이유원의 회답(함)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유원은 우선 이해 8월 하순에 출발한 譯官 李容肅편에 永平府守 游智開에게 서함을 보내어 이홍장의 입약 통상권고를 간접적으로 거부하였고, 다시 11월에 출발한 冬至使 韓敬源편에 이홍장에게 서함을 보내어 입약 통상권고를 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286)

 이유원이 입약 통상을 거부하는 이유로 든 것은 조선은 외교를 할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泰西學問’이나 ‘內地傳敎’, ‘阿片販賣’ 등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물산은 보잘것 없어 설사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을 한다 하더라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287)

 이유원의 회함은 私信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그것은 국왕과 논의된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외교문제에 적극적이었다고 전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을 거부한 것은 단순히 이유원의 회함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288)

 생각건대 조선에서는 유구의 병합으로 청국이 우려하는 만큼 일본의 침략이 임박하였다고 보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한 이유가 될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러시아의 경우에도 동일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홍장의 권고는 조선의 당로자들이 보는 일본이나 러시아의 정세를 감안하지 못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만큼 설득력을 갖지 못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289)

 한편 서양 여러 나라와 갑작스레 입약 통상한다는 것은 중대한 외교적 모험을 감행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여유를 두고 검토해 볼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또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은 이른바 ‘淸議’가 용납하지 않았다. 당시의 여론하에서는 서양과의 수교 통상 같은 것은 감히 입도 벌리지 못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290)

 이홍장의 밀함을 통한 청정의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권고는 이유원의 회함을 통한 조선측의 거부로 일단 좌절되었다. 본래 청국은 서양과의 수교를 계기로 조선의 외정에 개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조청관계의 변화, 혹은 수정을 뜻하는 것이어서 우리의 주목을 끌게 한다. 그러나 조선측이 서양 여러 나라와의 수교를 거부함으로써 청국의 그러한 의도는 일단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291)

 청국의 서양 여러 나라와의 입약 통상권고가 조선측의 거부로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無爲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적지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으로 하여금 국제정세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고종 17년(1880) 제2차 修信使 金弘集(1842∼1896)의 일본 파견이 그러한 것이었다.292)

 수신사의 파견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밀함을 받은지 얼마 안되는 8월 하순에 역관 이용숙을 청국에 파견하여 武備講究(무기제조 학습과 군사훈련)를 교섭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아마도 그것은 서양 여러 나라와 입약 통상함으로써 일어날지도 모를 모험과 여론의 압력을 피하는 동시에 이홍장이 밀함에서 권고한 바의 일단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조선측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고종이 강화도조약 이래 관심을 가져온 신무기 貿取의 실현을 위한 첫 시도가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293)

265)宋炳基,≪近代韓中關係史硏究≫(檀國大 出版部, 1985), 12∼13쪽.
266)宋炳基, 위의 책, 13∼15쪽.
267)위와 같음.
268)위와 같음.
269)위와 같음.
270)宋炳基, 위의 책, 15∼16쪽.
271)宋炳基, 위의 책, 16쪽 주22.

―――,<고종초기의 외교>(≪한국민족독립운동사≫1, 국사편찬위원회, 1987), 47∼48쪽.

≪同文彙考≫4 (國史編纂委員會, 1978), 3746∼3749쪽(乙亥 禮部知會抄錄 總理衙門與日本使臣往來節略及原奏咨回咨 謝禮部兼程飛咨兼陳與日本使臣辦理條約咨).
272)위와 같음.
273)原田環,<朝中兩截體制成立前史-李裕元と李鴻章の書簡を通して->(≪近代朝鮮の社會と思想≫, 東京, 未來社, 1981), 70∼71쪽.

宋炳基, 앞의 책, 16쪽

≪淸季中日韓關係史料≫2 (臺灣: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972), 373쪽.
274)權錫奉,<李鴻章의 對朝鮮列國立約勸導策에 대하여>(≪歷史學報≫21, 1963), 105쪽.

宋炳基, 위의 책, 16∼17쪽.
275)宋炳基, 위의 책, 23∼25쪽.
276)宋炳基, 위의 책, 21∼22쪽.
277)위와 같음.
278)宋炳基, 위의 책, 59∼60쪽.
279)宋炳基, 위의 책, 25쪽.
280)宋炳基, 위의 책, 19∼20쪽.
281)Key-Hiuk Kim, 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Korea, Japan, and the Chinese Empire, 1860∼1882(Berkeley:University of Califonia Press, 1980), pp.200·239∼340.

宋炳基, 위의 책, 23·25∼27쪽.
282)宋炳基, 위의 책, 23쪽.
283)宋炳基, 위의 책, 25∼27쪽.
284)權錫奉, 앞의 글, 113쪽.

宋炳基, 위의 책, 16∼17·27∼28·32∼36쪽.
285)宋炳基, 위의 책, 28∼32쪽.
286)權錫奉, 앞의 글, 114쪽.

宋炳基, 위의 책, 36쪽.
287)宋炳基, 위의 책, 37∼39쪽.
288)權錫奉, 앞의 글, 115쪽.

宋炳基, 위의 책, 39∼40쪽.
289)위와 같음.
290)위와 같음.
291)宋炳基, 위의 책, 31∼32·41쪽.
292)宋炳基, 위의 책, 41∼42쪽.
293)權錫奉,<領選使行에 對한 一考察-軍械學造事를 中心으로->(≪歷史學報≫17·18, 1962), 279∼280쪽.

宋炳基, 위의 책, 42∼44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