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치제도
갑오경장 기간에 채택된 내각제도는 국왕 및 왕실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내각중심의 입헌군주제 정부를 수립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 고종과 수구파 관료들은 실추된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의 위신을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중앙정부의 운영을 정상화시켜야 된다는 판단 하에 내각제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설하였다.
내각제 폐지 논의는 1896년 2월 말경에 南路宣諭使로 파견되었다가 6월 4일에 학부대신에 취임한 申箕善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는 당시의 모든 주요 관제를 갑오경장 이전으로 복구시키라는 상소를 국왕에게 올렸다. 그는 내각제에 대해 “정부에 규칙이 있어 내각대신이 국사를 의론하여 일을 작정하는 것은 님군의 권리를 빼았는 것이요 백성에게 권리를 주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이왕 정부에 있던 역적들이 한 일이라”고 비판하였다.599) 이에 대해서≪독립신문≫은 내각의 권한 강화가 곧 군주권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논리를 부정하는 동시에 민권을 보장 내지 확대시키려 했던 갑오경장의 개혁정신을 옹호하고, 나아가 서양의 선진 제도를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00)
한편 6월 초순 고종은 내각을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설하라는 밀지를 金炳始 등에게 내렸다. 이에 김병시 등은 영의정 및 좌·우의정을 두고 각부의 명칭을 吏·戶·禮·兵·刑·工·外部 등 7부로, 大臣을 尙書로, 協辦을 侍郞으로 각각 바꾼다는 의정부 復舊案을 국왕에게 올렸다. 또한 신기선·심상훈 등은 승정원을 부활시키고, 다른 관명·직명들을 舊制로 복구함으로써 완고한 지방 유생층의 호응을 유도하였지만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601)
그러나 지방제도의 개편 이후 내각의 존폐 문제에 대해서 타협이 이루어져 9월 24일에 의정부가 부활되었다. 이 때 고종은 갑오경장 당시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칭함으로써 “典憲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中外는 이로 말미암아 騷然하여 百官萬民의 憂憤痛駴함이 이제 3년이며 국가의 汚隆에 관계됨이 또한 컸다”고 반성하면서 “舊章을 率하되 新規를 참고하여 무릇 民國의 편의에 관계된 것은 짐작 절충하고 반드시 시행되기를 힘쓰라”는 취지의 조칙을 반포하였다.602) 이로써 근대적 내각의 기능을 유지한 채 전통적 의정부의 형식을 갖춘 절충형의 새로운 의정부체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조칙에 의거해서 당일에 칙령 제1호로<議政府官制>가 제정되었다. 이<의정부관제>는 “대군주폐하께서 萬機를 統領하사 의정부를 설치하시니라”고 규정하여 국정의 운영권이 국왕에게 있음을 선포한 前文과 3款 35條로 구성되었다. 그 3款(職員·會議·奏案)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의정부의 구성원으로는 총리대신을 개칭한 議政, 내부대신이 例兼하는 參政, 외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 등 6部의 대신을 포함한 11인의 贊政, 그리고 參贊 1인 등을 두었다. 다음으로 의정부 회의는 각료들만 개회할 수 있었던 종전의 내각제도와는 달리 국왕이 會[議]席에 친임하거나 왕세자가 代任한 가운데 열릴 수 있으며, 법률·규칙·제도의 신·개정 및 폐지, 외국과의 開戰과 조약체결, 내란진압, 전선·철로·광업개설, 세출입의 예·결산 및 예산외의 특별지출, 조세제도 개혁, 직원봉급의 개정, 民有토지·삼림의 보상, 대군주폐하의 特別下付사항, 법률·장정의 반포 등 중요한 국정 사항을 의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奏案에서는 의정부에서 결정된 의안을 국왕이 재론시키거나 부결된 의안을 재가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603) 이처럼 새로 마련된 의정부제도는 갑오경장으로 인하여 약화되었던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데 그 특징이 있었다.604)
그러나 이<의정부관제>는 형식상 총리대신을 의정으로 개칭하고 참정·찬정·참찬 등 새로운 직제·직명들이 추가되었을 뿐 각 부의 구성과 권한은 실제로 내각제도와 큰 차이가 없었다. 또한 내각제도 하에서 내각과 분리되어 있던 궁내부대신은 다른 각 부의 대신들과 달리 찬정을 예겸할 수 없도록 규정함으로써 의정부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의정부에서 결의된 주요 사안은 비록 국왕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되지만 회의에서만은 참석자들간에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되었다. 그리고 지방관의 임용권을 장악한 내부대신의 지위를 다른 대신들보다 우위에 두었다. 이러한 조항들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내각제도에서와 같이 의정부의 기능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조치였다.605) 따라서 새 의정부관제는 갑오경장 때 채택된 내각제도의 장점을 수용하면서 국왕의 권위를 높여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후 군주권을 강화시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97년 10월 13일 조야의 칭제 요구를 받아들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국정의 운영권을 직접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후 1898년 6월에는<議政府次對規則>이 반포되어 의정 이하 각 부 대신들이 매주 1회 모여 황제의 자문에 응하는 入對가 실시되고, 또한 매일 2명씩 돌아가면서 입대하는 전통적인 次對가 부활되었다. 이로써 고종은 군권을 제약하였던 각종 규제에서 벗어나 국정을 주도할 수 있는 권한을 회복한 것이다.606)
또한 고종은 1898년 봄부터 내각의 자문기관으로 전락한 중추원을 근대적의회로 개편·활용하자는 독립협회의 요구를 묵살하고, 독립협회마저 해산시킴으로써 황제권을 공고히 하였다.607) 이어서 1899년 7월 2일에 고종은 교전소를 法規校正所로 개칭하고 새로운 국제를 마련토록 지시한 결과 8월 17일에 법규교정소에서 마련한<大韓國國制>가 반포되기에 이르렀다.
<대한국국제>에 의하면, 대한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국이자 萬世不變의 專制政治國이었다. 따라서 황제는 육·해군의 통솔 및 편제, 계엄 및 해엄, 법률의 제정·반포·집행·개정과 사면·복권, 행정 각부의 관제와 문무관의 봉급 제정·개정, 관리의 임면, 외국과의 조약·선전·강화·사신파견 등에 관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608) 즉, 황제는 행정·사법·입법은 물론 군사·외교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무한대의 불가침적 군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받게 된 것이다.609)
<대한국국제> 선포 후 고종은 갑오경장 때 신설된 궁내부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이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황제권을 확장하였다. 궁내부는 갑오경장 기간 탁지부 관할 아래 놓여진 각 궁 소관의 宮庄土와 驛屯土, 漁鹽稅·船稅·包肆稅 등 각종 잡세의 수세권 및 홍삼 전매권을 탁지부로부터, 광산 이권을 농상공부로부터 각각 이관받아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또 화폐주조 수입을 독차지함으로써 황실의 재정수입을 확장하였다. 아울러 궁내부는 갑오경장으로 위상이 격하되었던 弘文館·敦寧院·太醫院과 근대화사업 추진과 관련있는 通信司·鐵道院·鑛學局, 그리고 팽창되는 황실재산을 관리하는 內藏院 등을 그 산하에 두었다. 이처럼 궁내부의 조직이 비대하고 소관업무가 방대해짐에 따라 의정부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었고 국고수입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610)
이상과 같이 갑오경장 기간 입헌군주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제정되었던 내각제도는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폐기되고 말았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대한국국제>를 반포함으로써 갑오경장 때의 내각제 실시와 독립협회의 의회개설 시도 등으로 위협받았던 전제군주제를 공고히 하였다. 아울러 고종은 궁내부의 조직과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내각제 대신 부활된 의정부의 기능마저 약화시켰다. 그 결과 군주권은 갑오경장 이전보다 더 강화되고 있었다.611)
599) | ≪독립신문≫, 1896년 6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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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 ≪독립신문≫, 1896년 6월 4일. |
601) | 韓哲昊,<俄館播遷期 貞洞派의 개혁활동>(≪한국근현대사연구≫4, 1996), 303∼304쪽. |
602)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177∼178쪽. |
603)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179∼184쪽. |
604) | 宋炳基, 앞의 글(1976a), 58∼59쪽. |
605) | ≪독립신문≫도 개정된 의정부에 대해 “새 관제는 유럽과 미국정부를 지배하는 법들과 유사하며, 그리고 관료계층의 가능한 부패를 최소화시키게 될 것이다”고 긍정적으로 평하였다.≪The Independent≫, 1896년 10월 1일, Editorial 및≪독립신문≫, 1896년 10월 6일, 논설 등 참조. |
606) | 오연숙,<대한제국기 의정부의 운영과 위상>(≪역사와 현실≫19, 1996), 48∼49쪽. |
607) | 愼鏞廈, 앞의 책, 361∼375쪽. |
608)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541∼543쪽. |
609) | 田鳳德,<大韓國 國制의 制定과 基本思想>(≪韓國近代法思想史≫, 博英社, 1981), 110∼118쪽. |
610) | 徐榮姬,<1894∼1904년의 政治體制 動向과 宮內府>(≪韓國史論≫23, 서울대 국사학과), 384∼386쪽. |
611) | 宋炳基, 앞의 글(1976b), 89·90·105·10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