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방제도
갑오경장 중 박영효가 23府制로 개편했던 지방제도는 근대적 중앙집권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향촌사회에 대한 실태조사의 부족, 그리고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 발포에 의해 촉발된 의병 봉기로 말미암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더욱이 박영효는 지방제도의 개혁을 통해 자신의 측근들을 대거 관찰사로 발탁하였기 때문에 그의 실각 후 지방행정은 잠시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612)
아관파천 후 1896년 4월 3일에 내부대신 박정양은<各府觀察使·參書官·各郡郡守保薦內規>를 발포하여 종래 내각에 주어졌던 관찰사 및 군수의 임용권을 내부로 이관함과 동시에 내부지방국장 金重煥 등 12명을 地方制度 調査委員으로 임명하여 23府制 대신 13道 5都制를 골자로 한 새로운 지방제도의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613) 이어 6월 11일에 각 개항장에 知事를 임명하며, 지방관의 官等을 종래의 5등급에서 4등급으로 축소한다는 내용의 지방제도 개혁 초안이 마련되고 6월 26일에는 그 개정안이 내각에 상정되었다. 상정된 개정안의 주요 골자는 13道 5都護府에 1牧(濟州)을 추가하고, 지방관을 5등급으로 나눈 것이었다.614) 8월 4일에 국왕의 재가를 받아 발포된<地方制度·官制·俸給·經費改正>에 의하면, 새로운 지방행정체제는 漢城郡이 漢城府로 승격되는 한편 23부가 폐지되고 그 대신 전국이 13도 1목 322군으로 나뉘며, 지방관은 한성부를 5署로 획정하면서 判尹과 少尹을, 각 도에는 觀察使를, 부·목·군에는 府尹·牧使·郡守를 각각 두었다. 아울러 각 군은 結戶의 다소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누며, 소속관리들의 명칭도 將校를 巡校, 吏房·吏를 首書記·書記로 각각 개칭함으로써 당시까지 남아 있던 전통적 吏胥조직을 근대화하였다.615)
또한<地方官吏職制>의 제정으로 한성판윤과 관찰사는 내부대신으로부터, 군수는 관찰사로부터 각각 지휘와 감독을 받도록 함으로써 상하 명령복종체계가 새롭게 정립되었다.616) 그리고<地方官吏事務章程>에서 지방관이 식산권장, 도로 및 교량 보수, 질병 예방, 토지 개간, 식목 권유 등 인민을 보호하는 사무를 관할하도록 규정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617)
이외에도 지방관의 권한과 위치를 확실히 규정한<地方官吏應行體制>,<地方官吏職務權限>,<地方官吏赴任·在任給由規則>,<地方官吏任期>,<地方官吏銘心細則> 등이 반포되어 지방관의 충실한 업무수행을 촉구하는 동시에 중앙집권적·효율적인 지방행정을 기하려 하였다.618) 그러나 갑오경장기 面·里단위의 초보적인 지방자치를 실시하기 위해 기도되었던<鄕會規則>과 <鄕約辦務規程>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함으로써 면·리의 운영은 여전히 전통적인 관례에 따르고 있었다.
한편 內部는 지방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1896년 9월 1일과 3일에<戶口調査規則>과<戶口調査細則>을 각각 반포하고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구래의 五戶作統法을 十戶作統法으로 바꾸고 각 통에 統首를 임명하여 인민을 통솔케 하는 한편 매년 1월에 漢城 5署와 각 부·목·군에서 호적과 統表를 수취·수정하여 한성부와 관찰사를 거쳐 내부에 보내면 내부에서는 5월내로 이를 편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分籍·改籍을 수시로 시행하고 집집마다 戶牌를 달도록 하여 정확한 호수와 인구를 파악할 수 있게끔 조처하였다. 특히, “전국내 호수와 人口를 상세히 編籍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에 보호하는 이익을 均霑케 하고자 하니 인민 중에 原戶를 은닉하여 漏籍하거나 原籍內에 人口를 故意漏奪하는 자는 인민의 권리를 許有치 아니할 뿐 아니라 법률에 照하여 징벌하겠다”고 규정함으로써 호구조사의 목적이 인민의 권리 보호와 이익 시혜에 있다고 밝혔다.619) 이는 신분 귀속관계를 밝히고 搖役의 과징대상을 파악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던 종래의 호구조사가 이제 국세조사의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의미한다.620)
이상으로 살펴보건대, 아관파천기에 시도된 지방제도개혁은 1894년 이전의 道制로의 복귀와 府·牧의 재설치라는 측면에서 갑오경장 중 채택된 제도와 형식상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방관에 대한 내부대신의 체계적인 통제 및 郡單一化 체제의 확립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실현함으로써 행정의 능률을 높이려 한 점에서 그 지향성은 동일하였던 것이다. 이때 제정된 지방제도의 골격은 1904년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621)
612) | 柳永益,≪東學農民蜂起와 甲午更張≫(一潮閣, 1998), 102∼103쪽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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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66쪽. ≪高宗實錄≫, 고종 33년 4월 3일. |
614) | ≪駐韓日本公使館記錄≫11, 64쪽 참조. |
615)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115∼124쪽. 또한 1896년 8월 7일에는 갑오개혁기에 폐지되었던 인천·동래·덕원·경흥 등에 감리서가 복설되었다(≪韓末近代法令資料集≫2, 141∼145쪽). |
616)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124∼126쪽. |
617)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126∼127쪽. |
618)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136∼141·145∼146쪽. |
619) | ≪官報≫, 건양 원년 9월 4일 및 8일. 또한≪독립신문≫도 호구조사가 정부에 의한 국민의 권리 보호 차원에서 실시되는 것임을 홍보하였다(≪독립신문≫, 1896년 11월 10일, 잡보 참조). |
620) | 吳永敎,<19세기 사회변동과 五家作統制의 전개 과정>(≪學林≫12·13합집, 1991), 92∼93쪽. |
621) | 尹貞愛,<韓末 土地制度 改革의 硏究>(≪歷史學報≫105, 1985), 93∼10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