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경제제도
갑오경장 기간의 경제개혁은 국가재정의 효율적인 관리와 근대적 상공업의 육성을 주요 특징으로 삼았다. 즉, 재정의 탁지부로의 일원화와 예산제도의 채택, 금납제의 실시, 도량형의 통일, 정부차원의 상공업진흥책 수립과 상무회의소의 설립, 그리고 근대적 교통·통신망의 설치 등을 통한 근대적 경제체계의 확립 시도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대한제국기에서도 대부분 계승·추진되었다.
우선, 국가재정을 탁지부로 일원화하려던 기도는 황제권의 강화로 인해 좌절되었지만, 양전사업과 예산제도 및 은본위제의 채택 등 재정관련 개혁은 아관파천후에 지속되었다.
첫째, 내각으로부터 왕실행정을 분리할 목적으로 신설되었던 궁내부는<대한국국제>의 선포 후 그 조직과 기능이 확대됨으로써 정부의 재정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발휘했다. 앞에서 논급하였듯이, 궁내부는 갑오경장 당시 탁지부와 농상공부로 이관된 각종 수세권과 이권을 넘겨받아 관할하고, 심지어 매관매직을 자행하였다. 그 결과 궁내부가 탁지부에 정부관원의 봉급자금을 빌려줄 정도로 황실의 재정은 현저히 증폭된 반면 국고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622)
둘째, 갑오경장 당시 정부의 재정수입을 확충하기 위해 계획되었던 양전사업은 대한제국기에 들어와 비로소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1898년 7월 6일에<量地衙門職員及處務規程>이 반포되어 總裁官 3명·副總裁官 2명·記事員 3명·書記 6명으로 구성된 量地衙門이 설치되었다.623) 양지아문은 1899년부터 1901년까지 각 군에 量務監理와 위원을 파견하여 모두 124군에 대한 양전을 실시하였다. 이 사업은 1901년의 극심한 흉년으로 말미암아 일단 중단되었다가 1902년부터 1903년까지 다시 실시되어 총 218군에 대한 조사가 완료되었다.
양전사업과 아울러 1902년 10월 20일에 地契衙門이 설치되어 토지문건을 새롭게 발급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지계사업은 종래의 立案제도를 바탕으로 이미 개항장의 외국인 거류지에서 실시되고 있었던 지계제도를 전국에 확대시킴으로써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양전사업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음에 따라 지계 발급사무도 지지부진하였다. 그리하여 1902년에 지계아문이 양지아문을 흡수·통합하여 양전과 지계 발급을 동시에 시행하였지만,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이처럼 양전 및 지계사업은 국가재정을 확충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실패하였지만,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624)
셋째, 갑오경장 중 공포된<新式貨幣章程>은 여건의 불비로 실시되지 못하였고 또 1898년에 채택된 금본위제 역시 재정문제로 일시 보류되었다가 1901년에<貨幣條例>가 공포됨으로써 비로소 확정되었다. 이어 1903년에는<中央銀行條例>와<兌煥金券條例>가 제정되어 화폐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금본위제가 확정된 다음에도 국산 금이 일본으로 대량 유출되어 정부의 금보유량이 부족한 데다가 국가재정이 만성적인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본위제의 실시는 난관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금본위제 실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는 황실재정의 일부를 이 사업에 충당하거나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기도 역시 열강간의 견제와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더욱이 궁내부에서 황실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白銅貨를 남발함으로써 오히려 물가등귀를 야기하고 국가재정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625)
이외에 1895년 4월<會計法>의 발포를 계기로 채택된 근대적 예산제도는 일제 통감부가 설치될 때까지 실시되어 정부는 해마다 세입·세출 예산표를 작성·공개하였다.626) 또한 도량형제도는 신설된 平式院에서 1902년 10월 10일 度量과 衡의 기본을 각각 尺과 兩으로 정하고, 미터법을 겸용토록 하는<度量衡規則>을 제정함으로써 근대화되었다.627)
다음으로 갑오경장 때 六矣廛의 都賈權을 박탈함으로써 폐지하려던 상업특권제는 갑오경장 후 일본 등 열강의 상권침탈을 방지한다는 명분 아래 오히려 강화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주도 아래 각종 상공업진흥책이 모색·추진되었다.
첫째, 상인들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1899년 5월에<商務會議所規則>개정으로 강화되었다. 갑오경장에서 도고제를 폐지시킨 것은 상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상업활동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지만, 보호관세의 설정 등 불평등조약의 개정이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열강에 의한 국내상권의 침탈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628) 따라서 대한제국기에 보부상과 시전상인들은 국내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商務所와 皇國中央總商會를 조직하여 독점권을 요구하였고, 정부도 이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상인에 대한 통제책의 일환으로<商務會議所規則>을 개정하였던 것이다.<상무회의소규칙 개정안>에 의하면, 상무회의소를 商務社로 개칭하고, 상무사로 하여금 전국의 상무를 통할·의정케 하였으며, 그 간부로 社長·句管社長·副社長·事務長 각각 1명과 副事務 2명을 두었다. 또한 商務學校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상무를 학습토록 하고, 신문을 만들어 국내외의 물가변동상황을 광고함으로써 상업활동에 편리를 제공토록 규정하였다. 동시에 민간의 상인조직 설립을 금지하는 한편 임원직을 대신과 각도의 관찰사 등 지방관이 겸직토록 함으로써 상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권을 강화하였던 것이다.629)
둘째, 서양의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공업을 진흥시키려는 식산흥업정책의 일환으로 민관합동 내지 민간주도로 근대식 공장이 설립되었다. 방직업계를 예로 들면, 1897년에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와 安駉壽의 주도하에 大韓織造工場의 설립이 시도되었으나 안경수의 망명(1898.7)으로 이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뒤 1898년에는 민간인에 의한 織造勸業場이 설립되었고, 1900년에 閔丙奭·李根澔 등 고위관료가 종래의 시전자본을 끌어들여 鐘路織造社를 세우기도 하였다. 1901년 이후에는 민간에서 동력기와 기숙사 시설까지 갖춘 근대적 생산공장인 漢城製織會社를 비롯하여 金德昌織造工場 등 많은 공장을 설립하였다.
또한 잠업계의 경우, 1900년에 정부는 농상공부내에 蠶業科를 두고 서울과 평안도·함경도·경상도·충청도에 蠶業試驗場을 설치하는 등 근대적 양잠업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종래의 양잠법을 개선하여 획기적인 생산을 거둘 수 있는 인공양잠법을 보급시킬 목적으로 人工養蠶傳習所가 설립되었다. 이 전습소는 황제의 내탕금 1,000원과 所長 민병석의 의연금 1,000여 원을 기금으로 삼아 일본에서 신식 양잠법을 배워온 姜弘大 등을 초빙하여 인공양잠법을 교육하였다. 한편 1900년에는 金嘉鎭 등 전·현직 관료를 중심으로 大韓帝國人工養蠶合資會社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煙草會社·大韓苧麻製絲會社·沙器製造所 등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근대적 기업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630)
마지막으로, 갑오경장 기간에 추진되었던 근대적 교통·통신망의 신설 내지 확장은 중앙정부의 효율적인 지방통제 뿐 아니라 국민경제의 활성화, 그리고 국민생활의 편의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아관파천 후에도 도로·우편·전선·철도 등의 증설·개선사업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첫째, 서울의 도로망을 정비·확장하기 위한 治道사업은 갑오경장 당시 내무대신 박영효의<內務衙門訓示>와 박정양의<道路修治와 假家基址를 官許하는 件>등을 기초로 1896년 9월 29일에 마련된 內部令<漢城內 道路의 幅을 規定하는 件>이 발포됨으로써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내부령은 도성의 3대 장터를 연결하는 축으로서 假家가 도열한 번화가인 2대 중심도로만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향후 慶運宮을 중심으로 하는 放射線도로와 環狀도로 및 그 外接도로의 건설 등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도시개조사업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631)
또한 갑오경장 중 한성부관찰사를 역임하였던 李采淵과 내부토목국장 南宮檍 등에 의해 도로 수축 및 청결 사업이 추진된 결과 1896년에는 “서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불결했던 도시에서 가장 청결한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외국인의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632) 아울러 서울의 치도사업은 성문안뿐 아니라 성밖의 도로에까지 확대되었다.
둘째, 우편제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갑신정변(1884) 직후 郵政總局의 폐지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던 근대적 우편제도 설립기도는 갑오경장 기간 즉, 1895년 7월 18일에<國內郵遞規則>과<郵遞司官制>가 제정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 때의 계획에 따르면, 전국의 24개 요지에 郵遞司가 설치될 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한성·인천·개성·부산 등 10곳의 우체사가 개설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아관파천 후 이<우체사관제>에 의거해서 공주·전주·남원 등에 우체사와 우체지사가 설치됨으로써 우편사업이 활성화되었던 것이다.633) 이 무렵에 또한 우체구역을 우체사 소재지로부터 區內는 10리 이내로, 區外는 20리 이내로 정하는<郵遞區域劃定法>이 마련되었으며, 우편배달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우체물에 주소와 성명을 詳記토록 하라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634) 그리고 1897년 12월에 우체사 내지 우체지사가 설치되지 않은 지역의 우체사무를 취급하기 위해<臨時郵遞規則>이 제정되어 우체업무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고, 외국과의 우체업무도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셋째, 청일전쟁 이래 일본측이 군용전선 명목으로 독점하고 있던 西路·北路電線을 되찾는 등 전신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갔다. 1896년 3월 30일에 외부대신 이완용은 일본공사 코무라에게 종전 이후에도 일본 電信局이 사용하고 있던 漢城∼元山간 북로전선 전구간과 漢城∼義州간 서로전선 중 漢城∼開城구간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정부는 두 전선을 모두 환수하여 수리·이용하였다.
뒤이어 정부는<電報司官制>를 반포하여 총 27개의 전보사를 2등급으로 나누어 업무를 집행케 하고,<國內電報規則>을 제정하여 전신사업의 실시에 필요한 제도적 조처를 보완한 다음, 한성·개성·평양·의주 등지에 전보사를 설치하였다. 또한 전선 절단 및 훼손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는<電報事項犯罪人處斷例>를 발포하기도 하였다.635)
그후 전신망은 남쪽으로는 목포·진주까지 확장되고, 경부간에는 남로전선 이외에 충주를 경유하는 전선이 신설되었으며, 북쪽으로는 함흥·성진을 거쳐 경성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과 上海간에 氣象정보가 송·수신되었고, 만주 및 두만강변에서 각각 청국과 러시아 전선과의 접선이 가능해졌다. 이처럼 우편·통신시설이 확장됨에 따라 1900년에는 通信院이 신설되었으며, 국제우편연맹에도 가입하기에 이르렀다.636)
넷째, 갑오경장 중 일본의 군사적·경제적 침투를 목적으로 추진되었던 철도건설사업은 지체되다가 1900년에 궁내부에 鐵道院을 두고 鐵道會社를 설립함으로써 박차가 가해졌다. 비록 정부는 1898년에-미국인의 손을 거쳐-일본회사에 京釜철도부설권을 넘겨주었지만 철도부설 이권을 외국에 양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경인·경부철도의 감독사무를 농상공부에서 철도원으로 이전하는 동시에 西北鐵道院을 신설하여 경의·경원철도를 직접 부설하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1898년에 설립된 민간의 釜山鐵道會社는 부산과 下端간의 철도부설에 착수하였고, 또 三馬鐵道부설도 시도되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철도부설사업에 필요한 막대한 자본과 기술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637)
요컨대, 갑오경장 때 추진된 경제개혁 가운데 탁지부로 재정을 일원화하려던 시도는 황제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궁내부의 재정권이 강화됨으로써 좌절되었지만, 재정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예산제도·금납제·도량형 등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었고, 근대적인 상공업을 육성하려는 식산흥업정책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또한 갑오경장 중에 계획 내지 추진되던 교통·통신 시설의 건설사업은 아관파천 이후에도 계속 추진되어 근대적 교통·통신망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622) | 宋炳基, 앞의 글(1976b), 9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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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382∼384쪽. |
624) | 金容燮,<光武年間의 量田·地契事業>(≪韓國近代農業史硏究≫, 一潮閣, 1975), 502∼634쪽. |
625) | 羅愛子,<李容翊의 貨幣改革論과 日本第一銀行券>(≪韓國史硏究≫45, 1984), 59∼86쪽. |
626) | 趙璣濬,≪韓國資本主義成立史論≫(大旺社, 1977), 222∼227쪽. |
627) | ≪韓末近代法令資料集≫3, 445∼460쪽. |
628) | 姜萬吉,<大韓帝國期의 商工業問題>(≪亞細亞硏究≫50, 1973), 145∼147쪽. |
629)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478∼480쪽. |
630) | 姜萬吉, 앞의 글, 152∼160쪽. 趙璣濬, 앞의 책, 343∼346쪽. |
631) | 金光宇,<大韓帝國 時代의 都市計劃-漢城府 都市改造事業->(≪鄕土서울≫50, 1991). 李泰鎭,<1896∼1904년 서울 도시개조사업의 주체와 지향성>(≪韓國史論≫37, 서울대 국사학과, 1997). 韓哲昊,<대한제국 초기 한성부 도시개조사업과 그 의의>(≪鄕土서울≫59, 1999) 등 참조. |
632) | Isabella Bird Bishop, Korea and Her Neighbours, pp.427∼437. |
633) | ≪官報≫, 건양 원년 2월 18일·4월 14일·6월 1일·7월 20일·10월 7일·12월 9일. |
634) | ≪官報≫, 건양 원년 9월 15일. |
635) | 韓哲昊, 앞의 글(1996), 320∼322쪽. |
636) | 宋炳基, 앞의 글(1976a), 80쪽. |
637) | 金泳鎬,<韓末 西洋技術의 受容>(≪亞細亞硏究≫31, 1968), 335∼33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