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군사·경찰제도
아관파천 이후 국왕의 신변 보호와 ‘匪徒’(義兵) 진압 등의 목적을 위해 군사·경찰권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였다. 따라서 중앙군과 지방군을 확대·개편함과 동시에 러시아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근대적 훈련을 실시하고, 경무청을 확충함으로써 치안 확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우선, 1896년 3월 4일 수도방위를 담당한 친위대는 기존의 3개 대대에서 5개 대대로 증설되었으며, 4월 22일에는 대대 편제 자체는 유지하되 제1·2·3대대를 제1연대로 편성하고 나머지 제4·5대대는 독립대대로 존치시켰다. 그리고 4월 19일에 工兵과 輜重兵을 폐지하였으며, 6월 8일에는 兵馬隊를 없애는 대신 親衛騎兵隊를 신설하였다.638)
아울러 갑오경장 말기에 사관생도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일본식 무관학교를 폐쇄하고 러시아 교관을 고빙하여 러시아식으로 중앙군을 훈련시키는 작업이 추진되었다.639) 1896년 3월 10일 러시아황제의 대관식 특사로 임명된 閔泳煥은 러시아정부에게 조선 군대 및 경찰의 훈련을 담당할 200명 규모의 군사교관을 파견해줄 것과 새로 군대가 창설될 때까지 800명의 러시아병사가 국왕의 호위를 담당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정부는 이미 일본과 베베르-코무라覺書 및 로바노프-야마가타議政書를 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과 열강의 반발을 고려하여 러시아군대의 파한에 난색을 표명하면서 소수의 군사교관만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10월 21일에 민영환일행과 함께 뿌챠타(D. Putiata)대령 등 14명의 러시아교관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뿌챠타는 2,200명의 조선군을 훈련시켜 달라는 군부대신 李允用의 요구에 응하기에 앞서 조선군의 현황 파악에 착수하였다. 이에 정부가 러시아와 군사교관 파견 교섭을 벌였던 민영환을 군부대신으로 임명하여 군제개혁에 열의를 나타낸 지 이틀 뒤인 11월 4일에 러시아 교관단은 친위대 5개 대대 중 1개 대대의 정예병력 800명을 선발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때 선발된 군사들은 5개 중대로 나뉘어 보초임무와 체력단련 및 分·中·大隊 단위의 훈련을 받았고, 구식 레밍턴(Remington)소총과 러시아로부터 구입한 베르당(Berdan)소총 등으로 사격술을 익혔다.640) 그리고 1897년 2월 8일에 친위대는 1,070명으로 증원됨으로써 고종의 환궁에 대비하였다.
1897년 9월 30일에 친위대는 “군액이 가지런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제1·4대대를 통합하여 제1대대로, 제2·5대대를 통합하여 친위 제2대대로 개편됨으로써 총규모가 3개 대대로 축소되었다.641) 이러한 친위대 편제는 1902년 10월 30일에 1개 대대가 다시 증설되어 친위 2개 연대로 재편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친위대가 축소된 것과는 달리 제2차 개혁 때 공병 2개 대대를 시위 2개 대대로 개편함으로써 신설된 侍衛隊는 오히려 증설되었다. 1897년 9월 30일에 조칙으로 반포된<侍衛隊編制>에 의해 기존의 시위 2개 대대는 제1대대로 통합되고, 새로 선발한 군인들로써 제2대대가 편성되었던 것이다. 이어 1897년 5월 27일에 제3대대가 증설되어 시위 제1연대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642)
또한 국왕의 거동시 호위를 담당하는 扈衛軍이 증강되었다. 갑오경장에서호위대는 공병대에서 취용하였는데, 공병대가 해산된 뒤 친위 제3대대로 흡수된 상태였다. 따라서 1897년 6월 30일에 해산된 공병대 가운데 인원을 선발하되 시종원 시종 1명을 摠官으로 개칭하고 호위군을 새로 조직하여 시종원으로 소속시켰다. 그후 호위군은 630명의 호위대로 개편되었다.643)
중앙군제와 더불어 지방군제도 개편되었다. 1896년 5월 30일에 지방주둔 舊額兵을 재편성하여 기존의 평양·전주진위대 이외에 통영·대구·강화·청주·공주·해주·북청·춘천·강계 등 9곳에 地方隊를 설치하였다. 각 지방대는 지역의 형편에 따라 參領·正尉 등 장교를 비롯하여 병졸 각각 10그후 지방대의 주둔지는 6월 8일에 統營이 固城으로 바뀌었고, 8월 26일에는 병졸 150명 규모의 지방대가 충주0∼400명, 총 2,300명으로 구성되었다.644) ·홍주·상주·원주 등 4곳에 증설되었다가 9월 24일에는 고성·대구·강화·청주·해주·북청 등 6곳만 남겨두는 개편이 이루어졌다.645)
이러한 지방군의 증설·개편과정에서 1899년 1월 15일에는<鎭衛隊·地方編制 改正案>이 제정되어 지방군제가 정비되었다. 그리하여 지방군은 전주·평양의 2개 진위대대와 수원·강화·청주 등 14개의 지방대대로 편성되었다.646) 그 뒤 고성과 통천에 주둔했던 京軍이 철수하고 그 대신 고성지방대가 창설되었고, 의주·강계 등 4곳의 변경지방에 진위대대가 설치되었다. 이와 같이 진위대와 지방대로 나뉘어져 있던 지방군제는 1900년 7월 25일에 모두 진위대로 통합·개편되었다.647)
지방대 설치와 더불어 의병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의 각 군에는 砲手隊와 兵站이 설치되었다. 즉, 군 단위로 포수를 모집하여 15명을 1統으로 한 保護砲手를 조직하고 이를 頭領으로 하여금 영솔하도록 하였으며, 매년 봄·가을에 放砲시험을 통해 優等砲手를 선발해서 호포와 전세를 면제해주는 혜택을 부여했다. 이 포수제는 주로 삼남지방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시행되었으나 나중에는 함경남북도와 평안북도의 국경지역에까지 확대되어 국방력의 증강에 일익을 담당하였다.648)
이와 같은 중앙군과 지방군의 개편은 황제의 통치권 강화에 직결된 것이었다. 1898년 6월 29일에는 외국의 大元帥制를 모방하여 황제가 육·해군을 친히 통솔하되 황태자를 元帥로 삼아 통솔케 한다는 조칙이 반포되었다. 이어서 1899년 6월 22일에는 황제가 국방·용병·군사에 관한 명령권과 군부 및 경·외 각부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갖도록 하는 취지의 元帥府가 창설되었다. 원수부는 국방 및 작전계획·군대편성 및 교육·부대검열·군인상벌 등의 권한을 가졌으며, 그 관원은 모두 무관 중에서 선임토록 하였다. 그 산하에는 군무국·검사국·회계국·기록국 등 4국을 두고, 각 국장은 칙명을 받아 각부 대신에게 통보하고 중앙과 지방 각 부대에 대한 명령권을 가졌다. 그 결과 종래 군령 사항을 관장하던 군부의 군무국은 폐지되고 말았다.649)
그후 1899년 8월 17일에 군권을 비롯한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황제에게 집중시키도록 한<大韓國國制>가 선포되었고, 그 다음날 군부관제가 개정됨으로써 군부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군부대신은 군비를 관리하고 각 관해와 요새를 감독하는 권한만 갖게 되었다.650) 그 결과 황제의 군령 발동 및 주요 군사정책의 결정은 원수부의 보좌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고, 군사정책과 집행은 군령기관인 원수부와 군정기관인 군부가 분담하는 二元體制가 성립되었다.651)
다음으로 갑오경장 중에 신설된 警務廳은 그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아관파천기에 일부 보수파 관료에 의해 경무청을 폐지하고 종전의 捕盜廳을 부활시키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지만 지방제도 개편과 더불어 각부의 警務署를 폐지하는 대신 漢城府에 경무청을 그대로 두고 그 지휘 아래 道에는 總巡·巡檢, 府에는 巡校·巡卒, 郡과 牧에는 巡校를 각각 두어 경찰업무를 맡아보도록 하는 조처가 단행되었다. 또한 인천·동래·덕원·경흥 등의 개항장에도 경무서가 설치되었다.652) 그후 경무청은 조직의 확대과정을 거치면서 1900년 6월 12일 警部로 바뀔 때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상으로써 보건대, 갑오경장 중에 개편된 군사·경찰제도는 대한제국기까지 부분적으로 개편되기도 하였지만 기본체제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그 개편은 국가의 자주독립 유지보다는 황제권의 보위·강화와 정권 유지를 위한 국내치안에 치중했다는 한계를 지녔다.
638)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49∼50·77∼78·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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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9) | 車文燮,<舊韓末 陸軍武官學校 硏究>(≪亞細亞硏究≫50, 1973), 174∼182쪽. |
640) | 李玟源,<고종의 환궁에 관한 연구>(≪한국근현대사연구≫1, 1994), 15∼22쪽. |
641)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286쪽. |
642)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286·359∼360쪽. |
643)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263·295∼296쪽. |
644)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83∼85쪽. |
645) | ≪官報≫, 1896년 10월 19일. |
646)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437∼440쪽. |
647) | 宋炳基, 앞의 글(1976b), 63∼64쪽. |
648) | 鄭求福,<갑오개혁 이후의 新軍制>(≪한국군제사≫, 陸軍本部, 1977), 370∼371쪽. |
649)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504∼508쪽. |
650)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543∼545쪽. |
651) | 조재곤,<대한제국기 군사정책과 군사기구의 운영>(≪역사와 현실≫19, 1996), 118∼120쪽. |
652)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115∼126·147∼14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