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주중립외교론
독립협회는 국가의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방안으로 自主中立外交論을 제기하였다.
독립협회는 부국강병에 기초한 자주국방을 자주독립의 근본방책으로 인식하였으나,0666) 사실상 당시 조선의 독립이 열강의 세력균형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고, 군사력의 급속한 증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자주독립의 현실적인 방책으로 군사력의 양성보다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0667)
조선은 세계 만국이 오늘날 독립국으로 승인하여 주어 조선 사람이 어떤 나라에게 조선을 차지하라고 빌지만 아니하면 차지할 나라가 없는지라. 그런 고로 조선에서는 해·육군이 조금 있어 동학이나 의병같은 토비나 평정시킬 만 하면 넉넉한지라. 만일 어떤 나라가 조선을 침범하고자 하여도 조선정부가 세상에 행세만 잘했을 것 같으면 조선을 다시 남의 나라 속국이 되게 가만히 둘 리가 없다(≪독립신문≫, 1897년 5월 25일, 논설).
위의 독립신문 논설은 일부 연구자들이 독립협회의 외교치중론을 비판하는 논거가 되는 대표적인 글이다.0668) 그러나 위의 논설은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결코 자주국방을 무시한 외교치중론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위의 논설은 갑오개혁 당시 집권층이 일본에 편벽된 외교를 하다가 러시아에 의해 정부가 붕괴되었는데, 아관파천 이후에는 집권층이 러시아에 편벽된 외교를 한다고 비판하고, 당시로서는 군사력의 약함보다 편향된 외교가 자주독립의 유지에 더욱 문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글이었다.
그러면 독립협회 외교론의 핵심은 어디에 있었는가.
독립협회는 당시 한반도에 열강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이 세력균형을 최대한 유지시켜 독립의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0669) 독립협회는 조선의 외교가 약소국의 입장에서, 침략경쟁을 벌이는 강대국들을 상대로 하는 만큼, 열강에 시비와 침략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신의있는 선린외교를 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670) 그러므로 처음부터 불리한 조약을 맺지 말아야 하며, 이미 불리한 조약을 맺은 경우에는 신의를 지키면서, 힘을 길러 잃은 권리를 되찾는 실리외교를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671)
또한 독립협회는 조선이 특정국가에 편향외교를 취하면 불만을 가진 다른 강국에 의하여 정부가 빈번히 전복되는 사태가 발생되고, 조선문제로 인하여 강대국간에 불화와 전쟁이 발생되어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특정 국가 편향외교를 강력히 비판하고, 모든 국가를 ‘똑같이 친밀하게 대접하는’ 공평한 외교 곧 일종의 중립적 선린외교를 주장하였다.0672)
한편 독립협회는 외교를 친밀히 한다고 하여 “남의 나라를 편벽되게 믿고 의지하여 하는 일은 국가를 크게 해친다”고 하여 외세의존적 외교를 배격하고, “조선 사람을 잘 가르쳐 그 사람들을 데리고 그 사람들을 믿고 그 사람들을 의지하여 조선을 지탱해야 한다”고 하여 국민을 배경으로 한 자주외교를 역설하였다.0673) 이와 같이 독립협회는 국가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자주적·중립적 선린외교론을 폈던 것이다.
0666) | ≪독립신문≫, 1897년 2월 27일, 논설 및 6월 1일, 논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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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7) | ≪독립신문≫, 1896년 12월 19일, 논설. |
0668) | 朱鎭五,≪獨立協會의 對外認識의 構造와 展開≫(≪19세기 후반 開化改革論의 構造와 展開≫, 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5)와 崔德壽, 앞의 글은 이런 시각을 보이는 대표적 논문이다. |
0669) | 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3월 8일. 愼鏞廈, 앞의 책, 158쪽. |
0670) | ≪독립신문≫, 1898년 8월 6일,<외교관의 직분>. |
0671) | ≪독립신문≫, 1898년 8월 6일,<외교관의 직분> 및 18898년 8월 24일,<실신 말지어다>. |
0672) | ≪독립신문≫, 1897년 5월 25일, 논설 및 8월 10일, 논설. |
0673) | ≪독립신문≫, 1897년 5월 25일, 논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