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국민자유권론
독립협회는 국민평등권론과 더불어 國民自由權論을 제기하였다. 국민의 자유권은 본래 天賦不可讓의 자연권을 전제로 국가권력으로부터 침범을 방지하자는 데 그 시초의 출발이 있었다.0696) 갑신정변의 주도자들은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동일하며, 생명·자유·행복 추구의 움직일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는 천부의 자유권을 의식했고,0697) 갑오개혁 추진자들은 홍범 14조에 “민법과 형법을 제정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을 규정하여 국민의 자유권 보장을 천명하였다.0698) 독립협회 회원들도 “사람은 누구나 생명·재산·자유 등 하늘이 부여한 양보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0699)는 천부불가양의 인권론에 근거하여 국민자유론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의 국민자유권론은 먼저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의 자유로 주장되었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정부가 인민을 위하여 해야 할 제일의 목표는 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라 하고,0700) “법률이란 것은 인민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대 혈맥이라”0701) 하여, 법률에 의거 국민의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를 보장하려 하였다. 그들은 국민의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를 지배층의 압제와 수탈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따라서 독립협회는 국민을 재판에 의하지 않고 사사로이 형별을 가하지 못하게 하는 처벌의 법률주의, 법관이 발부하는 영장없이는 체포·구금할 수 없게 하는 영장제도, 재판에 의하여 유죄가 선고되기 전에는 죄인으로 취급하지 못하게 하는 범죄용의자의 인신보호, 피고인의 재판청구권과 신속한 공개재판, 피고인의 진술권과 변호인 조력권, 타인의 범죄에 의해 처벌받지 못하게 하는 형벌개별화 원칙 등에 입각하여, 私刑·고문·연좌법 등 전근대적인 인민 학대 요인을 제거하고, 樞要의 자유권으로 인식한 신체의 자유를 법과 재판에 의하여 보장하고자 하였다.0702)
또한 독립협회는 자주정신과 경제적 자립생활을 하는 국민의 힘에 의해서 국가의 진정한 개화와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므로, 조세 결정에 대한 인민의 동의권, 법률에 의해서만 세금을 받게 하는 조세법률주의, 국고의 손실과 국민의 재산 침해를 막으려는 재정체계의 일원화,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알게 하는 재정의 공개주의, 인민 스스로의 재산권 방어 등에 의하여 무명 잡세와 重稅 그리고 관인 권세가로부터 불가침의 국민재산권을 보호하고자 하였다.0703)
한편 독립협회의 국민자유권론은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로 주장되었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言權 자유는 天生權利라”하여 언론의 자유를 천부의 권리라 보았으며, 언론의 자유가 없으면 공론이 없어지고 공론이 없어지면 정부관인들이 인민의 생명·재산과 여러 권리들을 함부로 유린하여, 결국 국가 자체도 위태롭게 된다고 생각하였다.0704) 그리고 그들은 “개화한 나라일수록 시비하는 공론이 많고, 시비가 많을수록 개화가 점점 잘되며, …정치도 반대당이 있어서 서로 견제하여야 바르게 간다”고 하여, 언론의 자유를 개화와 바른 정치의 중요 요소로 보았다.0705) 이처럼 독립협회는 국민의 의사 표현의 자유를 천부의 기본적 권리로, 국가 권력으로부터 민권 유린을 방지하는 방편으로, 그리고 민력에 의한 국가 중흥의 첩경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같이 근대적 의사표현의 자유의식을 지닌 독립협회 회원들은 언론·출판의 자유(Freedom of speech and press)의 내용인 연설·토론·신문·잡지 등 근대적 매스컴의 수단을 구사하여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고 행동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당시에는≪독립신문≫·≪독립협회회보≫·≪매일신문≫·≪대한신보≫·≪경성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그리스도신문≫등 10여 종의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었다. 이러한 신문과 잡지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계몽지 또는 政論紙로서 자유민권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0706) 이 같은 독립협회의 근대적 매스컴의 활용은 종래의 민중운동에 근대성을 가미하여, 우리 나라 근대민중운동의 신기원을 이루었으며, 민권운동의 단계적 성공에 결정적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집회·결사의 자유(Freedom of assembly and association)도 언론·출판의 자유와 함께 민주국가에 있어서 사회적·정치적 활동에 불가결의 요소가 되는 것으로, 독립협회의 국민자유권 의식도 집회와 결사를 통하여 보다 구체화되었다. 당시의 정치·사회단체로는 독립협회와 전국에 걸친 지회, 協成會·光武協會·皇國協會·皇國中央總商會·仁川博文會·贊襄會·保信社·保民協會·開進協會 등이 있었다. 어용단체인 황국협회 이외의 단체들은 독립협회와 더불어 민권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집회와 결사를 의사표현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인식하고, 1898년 3월초에서 그 해 10월말까지 수천 수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만 해도 15·6차례나 개최하였다. 정부의 독립협회운동 탄압으로 그 지도자 17인이 투옥된 뒤, 만민공동회는 당시 정치·사회단체의 연합회적 성격을 띠고, 11월초부터 12월말까지 50여 일에 걸쳐 민중집회를 열었다. 기쿠치 겐조(菊池謙讓)와 다우치 타케시(田內武)는≪近代朝鮮裏面史≫에서 당시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鐘路町의 만민회는 雨天順延 이외에는 거의 每日과 같이 개최되었다.…鐘 路町은 獨立黨의 常設議事堂과 같고, 野會演壇은 帝國議事堂과 같이 咆哮를 계속하였다(菊池謙讓·田內武,≪近代朝鮮裏面史≫全, 東亞拓植公論社, 1936, 341쪽).
곧 독립협회 회원들은 언론·출판과 집회·결사 등 정치적 자유권을 국민의 기본권임과 동시에 다른 기본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독립협회는 신체 및 재산권의 자유와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국민의 자유권을 민주주의사상의 요체로 생각하고, 이러한 국민의 자유권을 지키기 위하여 천부인권론에 근거한 근대법체계의 수립을 주장했으며, 전근대적인 악법의 부활을 저지하기도 했고, 언론·출판활동과 만민공동회 같은 민중집회를 조직해 내기도 하였다.
0696) | 文鴻柱, 위의 책, 11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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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7) | <朴泳孝上疏文> 중 使民得當分之自由 以養元氣 참조. |
0698) | 李光麟,≪韓國史講座≫Ⅴ-근대편(일조각, 1981), 338쪽. |
0699) | The Independent, May 19, 1898, An Honest Confession. Channing Liem, America's Finest Gift to Korea:The Life of Philip Jaison(New York:The William Frederick Press, 1952), p.51. |
0700) | ≪독립신문≫, 1898년 4월 10일, 논설. |
0701) | ≪독립신문≫, 1898년 10월 20일, 잡보<청원서>. |
0702) | 柳永烈, 앞의 글(1973), 47∼51쪽. |
0703) | 柳永烈, 위의 글, 51∼54쪽. |
0704) | ≪독립신문≫, 1899년 1월 10일,<언권 자유>. |
0705) | ≪독립신문≫, 1898년 11월 7일,<논설;反對의 공력>. |
0706) | 오주환,<계몽과 저항의 전위(1)-한말의 신문>(≪한국현대사≫2, 신구문화사, 1969), 235∼246쪽. 白淳在,<계몽과 저항의 전위(2)-한말의 잡지>, 위의 책, 255∼26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