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3권 국권회복운동Ⅳ. 항일의병전쟁4. 의병전쟁의 발전2) 의병전쟁의 새로운 앙양과 평민 의병장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1. 한반도 중립화 운동
          • 1) 한반도 중립화론의 대두
            • (1) 임오군란 후 일본에서의 한반도 중립화론
            • (2) 거문도사건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 (3) 청일전쟁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 2) 대한제국의 영세중립화 시도
          • 3) 러·일 개전기 대한제국의 전시국외중립 선언
            • (1) 전시국외중립 외교
            • (2) 전시국외중립 선언
        • 2.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한국의 일본보호국화 과정
          • 2) 정부 주도의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반침략 자주 외교의 전개
            • (2) 을사조약 무효화 외교
          • 3) 민간인의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대영·대미 보호국화 저지 외교
            • (2) 대일 보호국화 저지 외교
        • 3. 특사의 헤이그 평화회의 파견
          • 1)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
          • 2) 고종의 3특사
          • 3) 특사의 장외 언론활동
          • 4) 특사 파견의 파문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1. 유생의 상소 투쟁
          • 1) 을사조약 체결 이전의 상소운동
          • 2)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
        • 2. 시민의 투쟁
          • 1) 지방세제의 시행과 시장세 징수
          • 2) 순천·용천 양시의 시장세 반대운동
          • 3) 시장세 반대운동의 전국적 확산
        • 3.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
          • 1)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배경
          • 2) 황무지개척권의 요구
          • 3) 한국민의 반대운동
            • (1) 언론·상소 투쟁
            • (2) 농광회사의 설립
            • (3) 보안회의 투쟁
          • 4)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철회
        • 4. 국채보상운동
          • 1)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 (1) 일본의 차관공세
            • (2)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 2)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 (1) 국채보상운동의 확산
            • (2) 여성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 3)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 5. 의사·열사의 항쟁
          • 1)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 (1) 스티븐스의 친일 외교활동
            • (2)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 (3) 장인환·전명운 의거의 영향과 의의
          •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 (1) 이토 히로부미 사살 배경
            • (2)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과 그 역사적 의의
          • 3) 이재명의 이완용 척살 미수
      • Ⅲ. 애국계몽운동
        • 1. 애국계몽단체
          • 1) 초기의 계몽단체들
            • (1) 보안회
            • (2) 공진회
            • (3) 국민교육회
            • (4) 헌정연구회
          • 2) 대한자강회
            • (1) 대한자강회의 설립과 조직
            • (2) 대한자강회의 계몽사상
            • (3) 대한자강회의 자강독립운동
          • 3) 신민회
            • (1) 신민회의 창건과 목적
            • (2)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
          • 4) 대한협회, 기타 학회들
            • (1) 대한협회
            • (2) 계몽학회들
          • 5) 애국계몽단체 활동의 역사적 의의와 그 한계
        • 2. 애국계몽사상
          • 1) 애국계몽사상의 개념과 형성
            • (1) 애국계몽사상의 개념
            • (2) 애국계몽사상의 형성
          • 2) 국권회복의 논리
            • (1) 자강독립론
            • (2)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
          • 3) 국민국가건설의 논리
            • (1) 국민국가론
            • (2) 입헌군주정체론과 공화정체론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1) 민중계몽운동
            • (1) 신문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
            • (2) 회지·잡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
            • (3) 강연회·토론회를 통한 민중계몽운동
          • 2) 교육구국운동
            • (1) 근대학교 설립운동
            • (2) 교과서 편찬운동
            • (3) 의무교육 실시운동
            • (4) 실업·상무교육 실시운동
          • 3) 경제구국운동
            • (1) 황무지개간권 반대운동
            • (2) 국채보상운동
            • (3) 부동산침탈 반대운동
            • (4) 민족경제 건설운동
          • 4) 정치구국운동
            • (1) 을사조약 반대운동
            • (2) 고종양위 반대운동
            • (3) 한일합방 반대운동
          • 5) 민족문화운동
            • (1) 국어국문 진흥운동
            • (2) 국사교육 강화운동
            • (3) 민족적 종교운동
          • 6)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 (1) 독립전쟁론의 대두
            • (2) 독립군기지 건설준비
            • (3) 독립운동기지의 건설
        • 4. 105인사건
          • 1) 사건조작 배경
          • 2) 사건조작 경위와 사건 개요
          • 3) 재판 경위와 사건의 허구성
          • 4) 사건 연루자의 수난과 사회경제적 성향
      • Ⅳ. 항일의병전쟁
        • 1. 갑오·을미의병
          • 1) 갑오·을미의병의 배경
          • 2) 갑오의병의 전개
          • 3) 을미의병의 전개
            • (1) 을미사변과 을미의병의 개시
            • (2) 단발령 공포와 을미의병의 확대
          • 4) 갑오·을미의병의 사회적 기반과 성격
        • 2. 을사의병
          • 1) 을사의병의 재기
          • 2) 전국 의병의 활동
            • (1) 경기·강원도
            • (2) 영남지방
            • (3) 호서지방
            • (4) 호남지방
            • (5) 양서지방
          • 3) 을사의병의 의의
        • 3. 정미의병
          • 1) 군대해산
            • (1) 정미7조약
            • (2) 서울 시위대의 해산
            • (3) 남대문 전투
            • (4) 지방진위대의 항전
          • 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 (1) 중부지역의 의병전환
            • (2) 남부·북부지역으로의 확전
            • (3) 의병장들의 의병활동
          • 3) 이강년의 의병활동
            • (1) 이강년의 활동
            • (2) 무기와 전술
            • (3) 의병의 조직과 군율
        • 4. 의병전쟁의 발전
          • 1) 서울진공작전의 실패와 근거지문제
            • (1) 13도 의병부대의 서울진공작전
            • (2) 유인석의 지구전론과 근거지 문제
            • (3) 근거지 구상에 나타난 유인석 사상
            • (4) 서울 진공 실패 후의 분산활동
          • 2) 의병전쟁의 새로운 앙양과 평민 의병장들
            • (1) 스티븐스의 저격과 의병전쟁
            • (2) 평민 의병장들의 활동
            • (3) 한국합방안의 결정과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
          • 3) 호남지방의 의병전쟁과 남한대토벌작전
            • (1) 호남지방의 의병전쟁
            • (2)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
          • 4) 합방 전후의 의병활동
          • 5) 독립군 운동을 위한 근거지 창설
            • (1) 동만·남만의 한인사회
            • (2) 신민회의 근거지 창설
        • 5. 의병전쟁의 특징과 의의
          • 1) ‘전쟁’이라 하는 이유
          • 2) 의병전쟁사의 시기구분 문제
          • 3) 이념상의 특징
          • 4) 조직상의 특징
          • 5) 활동상의 특징
          • 6) 의병전쟁의 의의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의병전쟁의 새로운 앙양과 평민 의병장들

(1) 스티븐스의 저격과 의병전쟁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 의병전쟁의 추세는 일시 수세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 중에 1908년 3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가까운 오클랜드역에서 張仁煥·田明雲 의사가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스티븐스는 1904년 8월의 제1차 한일조약에 의하여 일본 정부가 추천한 한국 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친일반한적인 미국인이다. 그 배후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하고 전쟁의 결과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보호국화에 찬동한 미국 정부의 극동정책이 있다.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이 의병전쟁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일제 문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3월 하순에 전 한국 정부 고문 겸 통감부 촉탁이었던 스티븐스가 미국에서 排日主義者인 한인에게 살해되었다. 그 소식이 한국내에 전해지자 이것이 동기가 되어서 형세가 일변하고 賑勢가 또다시 격증되어 폭도봉기 이후 미증유의 熾盛을 이루어 그 소요 구역이 확대되었다(朝鮮駐箚軍司令部編,≪朝鮮暴徒討伐誌≫, 97∼98쪽).

그 결과 1908년 6월에는 전국의 의병장수가 241명, 의병수가 32,415명에 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241명의 의병장은 종래와 다른 성격의 의병장이라 하겠다. 즉 종래와 같이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유학자와 白面書生인 문인들이 의병부대의 지도부를 구성한 것과는 달리, 그 지명도가 좁은 지역에서 알려질 정도의 무명인사가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의병부대의 규모는 의병장의 지명도에 따라 규정된다. 많은 무명의병장이 등장하게 된 결과 의병부대의 규모가 적어진 대신, 의병활동의 기동성이 민활하게 되고 게릴라전에 의하여 적들에 대한 교란작전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다음 통계는 1908년을 전후한 시기의 의병전쟁의 추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연 도 전 투 횟 수 참 가 의 병 수
1907

1908

1909

1910

1911
323회

1,452 

898 

147 

33 
44,116명

69,832 

25,763 

1,891 

216 

<표 1>반일의병투쟁의 상황

1907년은 8∼12월간의 집계.
 1911년은 1∼6월간의 집계.
 전거는≪朝鮮暴徒討伐誌≫附集 제3표에서 작성.

도 별 전 쟁 횟 수 참 가 의 병 수
1908(후반기) 1909(전반기) 1908(후반기) 1909(전반기)
경 기

강 원

황 해

충 북

충 남

전 북

전 남

경 북

경 남

평 남

평 북

함 남

함 북

합 계
78회

273 

232 

113 

217 

219 

274 

153 

158 

108 

41 

99 

11 

1,976 
(4.0%)

(1.38)

(11.7)

(5.7)

(11.0)

(11.1)

(13.9)

(7.7)

(7.9)

(5.5)

(2.1)

(5.0)

(0.6)

(100)
165회

124 

111 

66 

138 

273 

547 

61 

161 

61 

17 

14 


1,738 
(9.5%)

(7.2)

(6.4)

(3.8)

(7.9)

(15.8)

(31.5)

(3.6)

(9.3)

(3.6)

(0.5)

(0.9)


(100)
1,453명

18,599 

7,998 

6,815 

7,666 

9,960 

10,544 

3,328 

5,702 

1,391 

2,590 

6,438 

283 

82,767 
(1.8%)

(22.5)

(9.7)

(8.0)

(9.0)

(12.0)

(12.7)

(4.0)

(6.9)

(1.7)

(3.1)

(7.8)

(0.3)

(100)
3,453명

2,468 

2,148 

832 

1,003 

5,576 

17,579 

934 

3,667 

540 

123 

270 


38,593 
(9.0%)

(6.4)

(5.5)

(2.2)

(2.5)

(14.5)

(45.6)

(2.4)

(9.5)

(1.4)

(0.3)

(0.7)


(100)

<표 2>1908∼1909년의 각 지방별 의병투쟁상황

전거는≪韓國獨立運動史≫1, 295∼296쪽의 표에 의함. 이 표는 韓國政府內部警務局의 조사통계로 경찰대가 관여한 전투횟수 및 의병수를 나타낸 것.
 姜在彦,≪韓國近代史硏究≫(한울, 1982), 324쪽.

<표 1>에서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은 1908년이 의병전쟁의 최고조기라는 점이다.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1909년부터 의병전쟁이 점차 곤란하게 되어 하향선을 걷게 되는데<표 2>가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1909년 전반기로부터 전투횟수나 참가 의병수에 있어서 전라남도 및 전라북도가 타 지방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관련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그러면 장인환·전명운의사는 왜 스티븐스를 저격했는가. 스티븐스는 1908년 3월에 임시휴가를 얻어 미국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이 자는 기자회견석상에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극구 찬양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를 말하고 있다.

① 일본은 한국을 보호한 이후 유익한 일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양국 국민의 교제는 점점 친밀해지고 있다.

②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는 방법은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는 것과 같다.

③ 조선에 신정부(일제의 괴뢰정부)가 조직된 이후 여기에 끼지 못한 정치인들은 일본에 반대하고 있지만 농민이나 일반 민중은 전과 같이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않으므로 모두 일본인을 환영하고 있다(鄭喬,≪大韓季年史≫권 9, 융희 2년).

이 담화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현지 한국거류민의 자치단체인 公立協會(1905년 4월에 결성)는 회의를 소집하여 그의 진짜 의도를 알기 위하여 담판하기로 결정하고, 공립협회 總代인 崔有涉을 비롯하여 鄭在寬·文讓穆·李學鉉 등 4명을 대표단으로 선출했다.

스티븐스는 공립협회 대표단의 항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버티고 있다.

한국에 이완용과 같은 충신이 있고 伊藤博文이 있는 것은 한국과 동양의 행복이다. 내가 한국 정황을 보니 太皇帝(왕위를 박탈당한 고종)의 실덕이 심하고, 완고한 수구당은 백성의 재산을 수탈하고, 민중은 우매하여 독립의 자격이 없다. 말하자면 일본이 탈취하지 않았다면 이미 러시아에게 병합되었을 것이다. 내가 일본의 정책을 찬양한다고 신문에 게재한 내용은 사실이다(鄭喬,≪大韓季年史≫ 권 9, 융희 2년).

이에 분개한 두 의사가 워싱턴으로 가는 그를 오클랜드역에서 대기하다가 저격한 것이다. 그에게 명중한 권총탄은 장인환의 것이었다. 장인환은 25년, 전명운은 95개월의 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공립협회의 기관지≪공립신보≫는<奸賊 須知分 砲擊顚末>이란 표제로 두 의사의 의거를 자세히 보도했으며 한국내서는≪大韓每日新報≫가≪공립신보≫의 기사를 그대로 전재하여 국내에서 알게 하였다. 동시에 두 의사에 대한 재판을 독립재판이라 하고 그 승리를 위하여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당시 스티븐스 저격사건의 영향이 한국내에서 파급되는 것을 일본 정부가 얼마나 두려워했는가에 대해서는≪대한매일신보≫사장 베델(E. T. Bethell)을 한국에서 추방하기 위하여 영국 정부에 외교교섭을 벌이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1262)

스티븐스 저격 후의 의병전쟁의 확대에 대처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는 같은 해 5월에 종래의 일본군 1개 사단, 1개 여단, 기마병 파견대(4개 중대), 2,000여 명의 헌병대에 추가하여, 2개 연대의 군대를 증파함과 동시에 일진회원을 중심으로 헌병대 보조원 4천 명을 모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병전쟁에 대한 탄압 무력인 일본군, 헌병, 경찰에 대한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韓國駐箚軍司令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중심으로 헌병대 사령관 아카시 겐지로(明石元二郞), 이완용 정부 內部 경찰국장 마츠이 시게루(松井茂)로 수뇌부를 구성하였다.

또한 각 지방에 대한 헌병과 경찰의 포치망을 더욱 조밀히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1908년 현재로 헌병의 경우에는 51管區, 452分遣所, 13파출소에 2,374명의 헌병과 4,234명의 헌병보조원을 배치하고 있다. 경찰의 경우에는 70경찰서, 3分署, 339주재소에 4,960명을 배치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의 대부대에 의한 기동작전권과 배합하여 각 지방의 헌병·경찰에 의한 주류거점을 조밀히 포치함과 동시에 지휘부와 주류거점 및 주류거점 상호간을 연결하는 도로망과 통신망을 건설하기 위하여 포로가 된 의병들과 지역주민들을 강제동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완용 괴뢰정권은 1908년 9월에 內部訓令으로<자위단규칙>을 발표하여 의병부대의 탄압에 한국인을 동원하여 자위단을 조직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헌병과 경찰이 통제하는 자위단은 호구조사에 관한 일, 개인이 소유하는 무기의 수거에 관한 일, 경제에 관한 일, 적정을 탐지하여 관헌에 보고하는 일 등을 담당케 하였다. 물론 헌병보조원이나 자위단원은 한국말을 잘하고 지형과 민정에 익숙하였다. 즉 종래의 의병 대 일본군경간의 대립관계를 ‘以韓制韓’ 정책에 의하여 한국인간의 적대관계로 전환시키자는 조치이다.

일제는 이와 같은 ‘이한제한’ 정책에 의한 한국인 내부의 분열을 이용하여 의병과 군중과의 연계를 단절시키고, 군중 속에 숨어 있는 의병과 그 중심 인물을 내탐하여 체포하는 데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따라서 의병전쟁의 전기간을 통하여 1908년은 의병부대들이 가장 위세를 떨친 반면에 1909년부터 하향선을 걷게 되는 고비가 되었다. 의병전쟁은 더욱 간고하게 되었고, 의병활동지역의 주변 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에 의하여 일반 군중의 피해도 가속도로 증가되었다.

1262)필자는 영국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외교교섭과 한국에서의 베델재판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였다(姜在彦,<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과 그 수난>, 앞의 책).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