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농민층의 항조운동과 반제 반봉건 투쟁
갑오개혁 이후 한국 농업에서는 일본의 침략으로 농민경제가 몰락하고 대신 지주들의 토지겸병이 확대되고 지대수탈이 강화되는 변화가 있었다. 그러한 지주제의 확대와 강화는 일본이 추진한 농업식민책에 호응해 한국의 주요 농업지대에서 대량으로 토지를 겸병해 일거에 거대지주가 되었던 일본인 지주·자본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지주제는 양적인 측면에서만 강화된 것이 아니라 그 성격이나 재생산구조면에서도 식민지 지주제로 재편되는 변화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지주제가 확대, 강화되는 것에 대해 농민층은 강력히 저항하였다. 그 저항은 단순한 抗租運動으로 전개되기도 했으나, 이 시기 지주제 변동의 이러한 성격을 반영하여 반제 반봉건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의 항조는 지대 인상폭이나 소작 조건의 변화가 가장 컸던 역둔토에서 가장 활발했다. 역둔토에서 항조는 개별적으로 전개되기도 하고 집단적인 형태를 띠기도 하였다.516)
개별적인 항조는 지방사회에서 나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양반·豪勢家·富家·吏屬·兵丁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 중에는 직접 역·둔토를 경작하는 소작인도 있었지만 중답주로 활동하였던 자들이 많았다.
이에 비해 집단적인 항조는 영세 빈농층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집단적인 항조는 내장원에서 타작제의 도입을 추진하면서 지대를 인상하려한 1904년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작인들은 타작제의 도입을 ‘加賭’ 즉 지대 인상이라 거부하며 捧稅官이 파견한 幹事人이 추수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고 심지어는 실력행사로 구축하기까지 하였다. 작인들은 항조투쟁에 자신들이 상호부조를 위해 결성한 ‘一心契’·‘農契’ 등의 조직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한 예로 1909년 安邊郡 朔安驛에서는 타작제에 반대해 수십 명의 작인이 ‘일심계’를 칭하면서 마름[舍音]을 난타하고, 일부에서 타작해 거두어 둔 도조를 도로 나누어 가져가 버린 사태가 발생하였다.517) 한편 작인들의 집단적인 항조는 민란을 방불케 하는 형태로까지 격화되기도 하였다. 1899년 砥平郡에서는 壯屯의 無土屯에 대한 도조 강제에 대항하여 각 洞의 작인들이 沙鉢通文을 돌려 賭稅 납부를 거부하고, 觀察府에서 巡檢을 파견해 주동자를 검거하려하자 수백 명의 작인이 이를 저지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던 것이다.518)
지주제 강화에 반발하는 농민들의 저항은 나아가 반제 반봉건의 義兵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519) 의병들은 일제의 식민지화 과정에 편승해 치부에 열중한 지주나 富民들을 “다만 부자될 생각만 하고 나라 일은 돌보지 않는” 존재로 규정하고 공격하였다. 의병들은 소수 애국적인 지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주층을 공격하였다. 의병의 공격은 추수곡을 탈취하거나 마름이 지대를 징수하지 못하게 명령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 경우 의병들은 소작인들에게 추수곡을 지주에게 납부하지 말고 대신 의병부대에 납부해 국권 회복을 후원하게 하였다. 의병이 지주층을 공격하면서 防穀令을 공포하기도 하였다. 그 방곡령은 지방의 富饒民들이 곡가의 지역간 차액을 노리고 곡물을 타지역으로 暗賣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로, 이를 통해 농촌시장을 보호하고 곡가를 안정시켜 소빈농층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격으로 이 시기에는 비록 지주제가 확대, 강화되는 추세에 있었지만 지주경영 자체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거두어들인 지대를 경찰서로 옮겨 보관하는 지주도 있었고, 도조를 운반할 때 일본 순사의 호송을 받는 지주도 있었다. 또한 의병의 공격을 견디다 못해 일본 군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서울이나 항구·읍 등지로 피신하는 지주도 적지 않았으며, 헌병출장소를 자기 지역에 유치해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지주도 있었다. 경영이 불안정하기는 일본인 농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일본 헌병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지만 그렇더라도 자체 경비체제를 갖추고 늘 경계 속에서 불안하게 지주제를 경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일제가 자국의 지주·자본가를 앞세워 추구하고자 한 식민지 지주제 체제로의 재편은 착수단계에서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재편은 일제가 폭압적으로 의병전쟁을 진압한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화 될 수 있었다.
<李潤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