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관전현
관전현에서는 3월 22일부터 長陰子 한인들을 중심으로 1주일간 계속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 시위에는 100명의 시위대와 환인현으로부터 무장대 10명이 합세하여 국내진공을 시도하였다. 灣溝 태평초에서는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자 곧 결사단을 조직하여 국내 각지 진공계획을 수립하였다. 小雅河에서도 독립만세시위와 함께 무장대를 결성하여 국내진입을 시도하였다. 이와 같이 관전현의 모든 시위운동은 만세시위로 그치지 않고 무장대를 조직하여 국내 진공을 시도하거나 준비하였다. 이것은 3·1운동 이후 본격화될 무장투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小不太遠의 한인 100명은 4월 1일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친일행위를 한 조선인조합 지부를 습격, 지부장과 평의원을 포박하여 전향을 촉구하였다. 3일과 4일 下漏河 초황구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200명이 초황구 예배당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대회를 개최하였다. 10일 소불태원과 하루하 한인들이 연합한 300명이 압록강변 石桂子에서 독립운동의 개시를 선포하고 일본 헌병과 밀정을 살해할 것이며, 동지들과 단결할 것을 맹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