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간회의 창립
1926년 후반,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를 조직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던 천도교 신파의 최린과 동아일보사의 金性洙·宋鎭禹 등은 다시 비밀리에 자치운동단체를 조직하려 하였다. 물론 이들의 계획은 무산되었으나, 이들의 자치운동단체 재결성 움직임은 신간회를 발기시키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일제가 포착한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26년 말 우연히 평안북도 정주 소재 오산학교 교사로 있던 홍명희는 동기휴가를 이용하여 경성에 와서 최남선을 방문한바 최남선으로부터 그들의 의견을 전해듣고 동시에 서로 자치문제에 대하여 밤을 밝히며 토의하였다. 다음날 홍명희는 안재홍을 방문하고 신석우를 초치하여 대책을 협의한 결과 급속히 진실된 민족당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서 권동진·박래홍·박동완·한용운·최익환 등의 찬동을 얻어 홍명희로부터 재북경 신채호에게 飛檄하여 역시 찬동을 얻어 발기인에 참가시키고 당국과 접근성을 가진 신석우를 개재하여 그 양해를 얻고 ‘新幹出古木’이라는 말에서 취하여 신간회란 명칭을 정하였다(警高秘 第8036號 京畿道,≪秘密結社朝鮮共産黨竝ニ高麗共産靑年會事件檢擧ノ件≫;姜德相·梶村秀樹 編,≪現代史資料≫ 29, みすず書房, 1972, 95쪽).
즉 신간회의 발기논의는 자치론자들의 자치운동 소식을 알게 된 다음날부터 추진된 점으로 보아 최소한 1926년 12월 이전부터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간회 발기 움직임은 1927년 들어 더욱 진전되었다. 동년 1월 초 권동진·홍명희·박동완·李甲成·韓基岳 등은 조선일보사에서 회합하여 신간회 발의를 합의하고 발기인들과 접촉하여 가입 승낙을 받는 동시에 강령을 초안하는 등 창립준비를 서둘렀다.307) 그 결과, 1월 14일 다음과 같은 강령을 발표하였다.
① 조선민족으로서 정치·경제의 究竟的 해결을 도모한다. ②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③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령은 일제의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신간회 준비인사들은 일제 당국과 절충하여308) 다음과 같이 수정된 강령을 발표하였다.
一.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一. 우리는 단결을 견고히 한다. 一.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위 강령은 1927년 1월 19일 27인의 명의로 신간회가 정식 발기되는 자리에서 발표되었다. 신간회 창립 때 간부진을 분류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계:李商在·安在鴻·申錫雨·李昇馥·張志暎·崔善益·韓基岳·洪性熹·李晶燮 기독교계:朴東完·曺晩植·金永燮·朴熙道·吳華英·兪珏卿·鄭春洙 불교계:韓龍雲 천도교계:權東鎭·朴來泓·李鍾麟 유림계:金明東·李 淨·河載華 조선공산당계:金俊淵·李錫薰·韓偉健·(洪命熹)·宋乃浩 학계:兪億兼·李順鐸·金活蘭·趙炳玉
이들 중 권동진·김명동·박동완·백관수·신석우·신채호·안재홍·장지영·하재화·한기악·한용운·홍명희·이정섭·이종린·권태석·명제세·박희도·송내호·오화영·정춘수·최익환 등 23명은 2·8독립선언에 가담하였거나 3·1운동 관계자,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던 사람들이었다. 즉 3·1운동 이후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1920년대 전반기 꾸준한 활동을 통하여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7년 2월 15일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신간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250명의 회원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방청인까지 합하면 1,000여 명이 넘는 성황을 이루었다.309) 임시의장으로 선임된 신석우의 진행으로 서기와 사찰의 선출, 회원점명, 조선민흥회와의 합동 경과보고, 편의상 신간회란 이름을 그대로 쓰기로 하였다는 보고 등이 있었다. 회장에는 李商在가 추대되었고 부회장에는 홍명희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날 대회에서 일제가 선언 발표를 금지시킴에 따라 규약대강만 통과되었다.310)
이와 같이 신간회의 창립은 민족단일당 또는 민족유일당의 매개형태로서 일단락되었다. 신간회 창립의 직접적 계기는 민족주의 좌파를 중심으로 한 反自治論에 있었다. 또한 1925년 1월부터 조선 국내의 여러 세력들이 제기한 민족협동전선론과 그에 따른 실천들이 근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