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조선 사회1. 조선 왕조의 성립과 발전

(1) 조선의 건국과 제도의 정비

사대부의 등장

고려의 무신란 이후로 귀족 문벌 중심의 폐쇄된 신분 질서가 무너지면서, 신분 변동이 촉진되었다. 노비와 부곡민 가운데서 평민으로 올라가는 부류가 생기고, 평민이나 서리, 향리 중에서 관료(양반)로 진출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그러나, 정치적 실권은 여전히 소수의 권문 세족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하층민과 중간층의 신분 상승 노력은 권문 세족과 자주 갈등을 일으켰다. 즉, 권문 세족은 토지와 노비를 더 많이 차지하려 하였고, 힘이 약한 평민은 권문 세족의 노비가 되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 있어 스스로 그들에게 투탁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평민 중에는 노비와 비슷한 천민으로 떨어지는 부류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신분 변동의 추세는 원의 간섭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원에서 새로운 학술과 종교를 배우고 돌아온 지식인도 생겨났고, 통역관이나 응방(鷹坊)의 관계자 중에서 정치적 실력자도 배출되었다. 그리고, 중국이나 만주에서 귀화해 오는 외국인도 늘어 갔다. 한편, 공민왕 이후에는 홍건적이나 왜구와의 전란이 계속되면서 무인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학자, 종교인, 관료, 무인 들은 대개가 경제적으로나 신분적으로 중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향촌이나 변방에서 배출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체질은 일반적으로 구질서에 대한 집착이 약하고 진취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한편, 새로운 사회를 이념적으로 이끌어 간 것은 학자, 관료 들로서, 그들은 유교적 소양이 깊어서 사대부(士大夫)라고도 불렀다. 사대부들은 최씨 무신 정권 시대에 문학, 종교 방면에 종사하면서 새로운 문화 방향을 모색하였고, 그 뒤 성리학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경륜을 더욱 세련시킬 수 있었다.

공민왕 때 과거 제도와 학교 제도가 다시 정비되면서, 사대부의 이념과 세력은 급속히 심화되고 확대되었다.

사대부들은 고려 후기의 사회적 불안과 국가적 시련을 깊이 통찰하여 애국, 애민 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 철학을 가다듬고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내다보면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조선 왕조의 개창

고려 후기에는 권문 세족이 발호하는 가운데서 중앙 정권이 약화되고 왕권도 쇠퇴하였다. 도평의사사와 같은 특수 합의 기관이 상설적인 정치 기관으로 변질되면서 귀족 연합적인 정치 운영이 나타났다.

중앙 집권의 강화와 관료 정치의 정비는 사대부와 군주의 양면에서 요구되었다. 이러한 때에 공민왕이 즉위하여 승려 및 사대부와 연결을 가지면서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우왕이 들어서면서 권문 세족의 횡포는 극에 달하고, 사대부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 사대부는 점차 두 파로 갈라졌다. 즉, 고려 왕조의 테두리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파와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적극적인 혁명파가 서로 대립되었다. 이 때, 사대부의 절대 다수는 온건파에 속하였다. 그러나, 정도전, 남은 등과 같은 혁명파는 신흥 무장 세력과 농민 군사들을 끌어들여 역성 혁명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막강한 군사력과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가진 이성계를 끌어들인 것이 왕조 교체의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혁명파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밖으로 명과의 관계를 호전시키고, 안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정치 제도, 토지 제도, 군사 제도 등을 부분적으로 개혁하여 새 왕조를 개창할 정치⋅경제⋅군사적 기초를 다졌다.

이에, 정몽주, 이색을 비롯한 온건파 사대부들은 군주의 힘을 빌어서 혁명파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군사력을 가지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성계 일파는 권문 세족과 온건파 사대부들을 힘으로 누르고, 전제 개혁으로 민심을 수습하여, 마침내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1392).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

새 왕조는 고조선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여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정하고, 수도를 개성에서 농업 생산력이 크고 교통과 군사의 요지인 한강 유역의 한양으로 옮겼다. 한양은 그 후, 새 왕조의 수도이자 민족 문화의 중심지로서 발전되었다. 풍수 도참가들은 일찍부터 고려 시대의 남경이었던 이 곳을 명당으로 지목하여, 이씨의 성을 가진 사람이 왕조를 세울 것이라고 예언하였다.1) 이러한 도참 신앙은 조선 왕조가 민심을 획득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어서, 태종 때에는 왕권 중심으로 권력 구조를 바꾸고, 관제를 개편하여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양전 사업을 강화하고, 사원 경제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의 수입 기반을 넓히고, 신분 제도, 호적 제도,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양인을 늘리고 국역 기반을 확대하였다. 태종 때에 다져진 이와 같은 정치⋅경제⋅군사적 안정은, 그 다음 세종 때에 이르러 문화의 융성을 이루는 터전이 되었다.

세종 때에는, 정비된 중앙 집권 체제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면서 모범적인 유교 정치를 구현하였다. 황희, 맹사성, 허조 등과 같은 청렴한 재상을 등용하고 집현전을 왕립 학술 기관으로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젊고 재주 있는 학자들에게 고금의 문물 제도를 깊이 연구하여 정책 방향을 제시하게 하고, 문헌을 편찬하며, 서정을 비판하게 하였다. 세종은 학자를 우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민 복지 향상에 유의하여 조세 제도, 의창⋅의료 제도, 형벌 제도, 노비의 지위 등을 개선하였다.

세종은 또한 국토 확장에도 힘을 기울이고,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정신 문화와 국민 생활에 기여하는 기술 문화도 크게 진작시키는 등 민족 문화 전반이 발달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뒤, 문종이 단명으로 돌아가고 어린 단종이 뒤를 이으면서, 왕권은 약해지고 신권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다. 이에 불안을 느낀 왕실측은 비상 수단으로 수양 대군을 앞세워 왕권을 일으켜 세웠다.

세조의 집권은 신권 비대에 대한 왕권의 재확립을 의미한다.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부국 강병을 달성하여 국력을 키우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실시하여 국가 수입을 늘리며, 호적 사업과 호패제를 강화하여 국방 능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또한, 양성지, 권남 등의 보필을 받아 자주 의식을 고취하는 문화 정책을 펴서 국가 위신을 높이고, 북방 개척에도 힘을 쏟았다.

성종도 역시 학자를 우대하고 편찬 사업을 크게 일으켜,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집대성하여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이로써 1백여 년 간에 걸친 개혁은 일단락되었다.

경국대전   
조선 왕조 500년간의 기본 법전으로서, 세조 때에 최항 등이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때에 완성, 반포하였다.
1) 도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답산가, 도선가 등에 그러한 예언이 적혀 있는바, 이러한 도참서들이 고려 말 조선 초에 크게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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