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조선 사회1. 조선 왕조의 성립과 발전

(2)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명과의 관계

조선 초기에는 지속적인 영토 수복 정책이 추진되었다. 만주 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고토인 까닭에 실지 회복이라는 명분이 뚜렷하였다. 특히, 요동 지방은 동 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가늠하고 우리 민족이 웅비할 수 있는 요충지이므로, 원⋅명 교체의 기회를 이용하여 이 곳을 수복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우왕 때에도 요동 정벌군이 파견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내정 문제가 급하다는 것을 깨달아 위화도에서 되돌아왔으나, 왕조 개창 후에는 조직적인 요동 수복 운동을 다시 전개하였다. 정도전은 스스로 진도(陣圖)를 만들어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북방으로 운반하였으며, 여진인을 회유하여 협조를 구하기도 하였다.

명은 조선측의 의도를 일찍부터 알아채고 여러 가지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조선측은 적극적인 외교로써 명의 의심을 무마시키면서 신축성 있게 대처해 나갔으나, 조선 조정 내부에도 반대파가 많았다. 왕자의 난과 태조의 하야는 요동 수복 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태종 때부터는 대명 관계가 호전되었는데, 조선측은 요동 수복 운동을 보류한 대신, 여진족에 대한 토벌과 북방 이민 정책을 강화하여, 마침내 세종 때에는 압록강, 두만강 선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북방 이민 정책은 태종에서 중종 때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수만의 민호(民戶)를 남방에서 북방으로 이주시킴으로써 국토의 발전이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세종 말년에 몽고 지방에서 타타르의 세력이 커지자, 명은 50만의 원정군을 보냈으나 대패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에 큰 충격을 주어, 문종, 세조 때에 국방력 증강이 큰 과제로 제기되었다. 세조는 부국 강병책을 강화하는 한편, 강계에 둔병을 두어 요동 수복을 또다시 꿈꾸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조선과 명은 선린 우호 관계를 도모하면서 피차 문화 교류를 증진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실리 추구와 국토 확장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긴장이 계속되었다.

여진과의 관계

여진족은 예부터 우리 문화의 보급과 자극으로 성장한 민족으로, 고려 시대에 금을 세워 중국을 지배하기도 하였으나, 몽고족에게 패망한 뒤로는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부족 단위로 할거하고 있었다.

몽고족의 후퇴는 여진족에게도 활기를 주었으나, 통일 국가를 쉽게 이루지 못하고 조선과 명의 변경을 자주 침략하여 약탈하였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에는 많은 여진족 집단이 우리 민족과 잡거하면서 자주 소란을 야기시켰다.

조선은 이러한 여진족을 몰아 내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기본 목표 아래, 화⋅전 양면 정책을 취하였다. 먼저, 여진인의 귀순을 장려하여 관작, 토지, 주택 등을 주어 우리 나라 주민으로 동화시키고, 무역소와 북평관을 두어 국경 무역과 조공 무역을 허락하였다. 그들이 가져오는 물품은 주로 말과 모피류였고, 가져가는 물품은 식량, 의복 재료, 농기구, 종이 등이었다.

한편, 조선 정부는 국경 지방에 많은 진보(鎭堡)를 설치하여 각 고을을 전략촌으로 바꾸어 방비를 강화하고, 때때로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세종 때에는 최윤덕, 이천, 김종서 등이 차례로 여진족을 토벌하여 6진과 4군을 설치하고, 마침내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6진 4군   

일본 및 동남 아시아 각국과의 관계

여진족보다 주민을 더 괴롭힌 것은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왜구들이었다. 고려 말에는 왜구로 인하여 연해 지방이 큰 해를 입었다.

조선 정부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수군을 강화하고, 성능이 좋은 병선을 대량으로 건조하였으며, 화약 무기들을 개량하여 무기 조건을 크게 개선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는 200여 척의 함대를 조직하여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고 돌아왔다. 이렇게 조선의 국력과 국방력이 급속히 커짐에 따라 왜구의 침략은 현저히 줄어들고, 연해 지방이 다시 개간되어 경지 면적이 크게 늘었다.

왜구를 뒤에서 조종하던 일본 봉건 영주들은 노략질이 어렵게 되자 교역을 제의해 왔다. 조선은 이를 계기로 이른바 교린 정책을 써서, 왜구의 금압을 조건으로 제한된 조공 무역을 허락하였다. 부산포, 제포, 염포 등 3포가 교역의 장소였으며, 쌀, 무명, 삼베, 인삼, 서적, 공예품 등을 내주고, 황, 향료 등을 들여왔다. 일본측은 경제적, 문화적 욕구가 컸고, 조선은 국방에 필요한 물품과 기호품을 받아들였다.

한편, 조선 초기에는 류우큐우, 사이암, 자바 등 동남 아시아 각국에서도 사신과 토산물을 보내 오고, 조선의 문물을 수입해 갔다. 한양 거리에는 외국 사신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따라서 조선의 선진 문물들은 동 아시아 및 동남 아시아 각국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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