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조선 사회1. 조선 왕조의 성립과 발전

(3) 조선 초기의 사회 구조

신분 제도

조선 왕조는 중간층 출신의 사대부와 무인들이 하층민의 지지를 얻어서 세운 국가이다. 그리하여, 중간층과 하층민의 지위를 어느 정도 향상시키고 국가 수입 기반을 늘리는 방향으로 신분 질서를 개편하게 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실시된 일련의 전제 개혁은 각 신분 계층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평민들의 다수가 자기 토지를 가지게 되고 지주와 병작 농민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리고, 평민으로서 노비가 되었거나 노비와 비슷한 천민이 된 자를 조사하여 다시 평민으로 높여 주었다. 따라서, 노비의 수는 크게 줄어들고, 남아 있는 노비의 지위도 전보다 개선되었다.

한편, 고려 시대에 큰 농장을 가지고 있던 권문 세족이나 지방의 지주들도 중소 지주로 대개 평준화되고, 신분적으로는 평민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고려 시대에는 크고 작은 벼슬을 가지고 여러 가지 특권을 향유하였으나, 조선 왕조는 한량(閑良)이라 하여 그들의 특권을 제약하였다.

국가는 평민(양인)과 노비를 세습 신분으로 명확히 가르고 평민들에게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서, 호적 제도를 정비하고 호패(戶牌) 제도를 실시하였다.

호패   
현재의 신분 증명서로,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찼다. 신분에 따라 재료와 기재 내용이 다르다.

노비는 신분이 세습되고, 매매, 양도, 상속되었으며, 원칙적으로 벼슬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족을 거느릴 수 있었고, 특히 외거 노비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으며, 주인이 마음대로 생명을 빼앗거나 형벌을 가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평민(양인)은 직업의 귀천에 따라 권리, 의무에 약간의 차등이 있었다. 수공업, 상업, 광업, 제염업, 수산업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군역이 면제되는 대신, 국가에 일정한 기간 노력 봉사할 의무가 있었고, 벼슬은 낮은 군직이나 특수한 잡직만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향리와 역리는 원칙적으로 신분이 세습되었으나, 제한된 조건하에서 과거 응시가 허용되었다.

또, 농업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평민은 군역을 지는 대신, 출세에 법제적 제약이 없었다. 그들의 출세는 대개 본인의 능력(재능)에 좌우되었지만, 양반 자제만큼 활발하지는 않았다.

문⋅무의 관직을 가진 사람들을 양반(兩班)이라고 불렀는데, 양반 중에서 일부 고급 관료의 자제에게는 문음의 특전을 주어서 출세 조건을 좋게 하였다. 그러 나, 모든 양반이 항구적으로 신분이 세습되었던 것은 아니고, 평민이 양반으로 상승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교육 제도와 관리 선발 제도

조선 초기에는 교육의 기회를 늘리기 위해서, 학교를 증설하고 교육비를 국가가 부담하였다.

인문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에 성균관과 4개의 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군현마다 향교를 두어 각 지방의 인구에 비례하여 정원을 책정하였다. 전국의 학생 정원은 대략 1만 6천 명이었으나, 정원 외의 학생도 상당히 많았다.

성균관   
서울 명륜동 소재. 조선조 최고의 교육 기관. 초기의 입학 정원은 200명이었다. 사진의 건물은 공자를 모신 대성전이다.

학생들은 군역이 면제되었는데, 농번기에는 방학을 맞아 농사일을 돕고 농한기에는 기숙사(재)에 거처하면서 공부하였다. 따라서, 학생들은 농사와 학업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술 교육은 의학, 역학, 이학(吏學), 산학, 율학,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 등으로 나누어 해당 기술 관청에서 가르쳤다. 기술 교육은 특히 지방적 특성을 고려하여 교육 내용과 학생 수를 조정하였다. 예컨대, 서북 지방에서는 한학을 중요시하고, 동남 지방에서는 왜학(倭學)을 장려하였다.

관리는 원칙적으로 학생 중에서 뽑았는데, 학생이 관리로 나가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인문 학생이 생원, 진사를 거쳐서 성균관에 입학하고 다시 문과를 통과하여 요직으로 나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 학생이 잡과를 거쳐서 기술관으로 나가는 길이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간단한 시험을 거쳐서 서리나 하급 관료로 나갈 수도 있었으나, 이런 경우에는 요직으로 나가기가 어려웠고, 요직으로 나가고 승진이 빠르려면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과거 시험은 수공업자, 상인, 무당, 승려, 노비, 서얼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으나, 뒤에 차차 가문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고시 제도는 조선 왕조에 들어와 가장 정비되고 확충되었으며, 신분 이동을 촉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출판⋅인쇄 문화가 발달하여 서적이 많이 보급되어 가정이나 서당에서의 초등 교육이 쉬워졌고, 16세기 이후로 서원이 설립되면서 교육의 기회는 더욱 넓어졌다. 교육의 발전은 조선 왕조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병역 제도와 군사 조직

조선 왕조는 국방 강화에 크게 주력하여 병역 제도가 정비되고 군사 조직이 강화되었다. 병역은 양인 개병과 병농 일치를 원칙으로 하였다. 즉, 16세 이상의 양인 장정들은 누구나 군역을 져서 현역 군인이 되거나 또는 군인의 비용을 충당하는 봉족(보인)이 되어야 했다. 그것은 양인 농민이 자유 평민으로서 가지고 있는 권리에 대한 댓가이기도 하였다. 노비는 권리가 없기 때문에 군역의 의무도 없었다.

군인은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었다. 5위를 기간 부대로 하는 중앙군은 궁궐 수비와 수도 치안을 담당하고, 그들의 일부는 당번이 끝나면 지방에 내려가 지방군으로 근무하였다. 지방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어 국방상 요지인 영(營), 진(鎭)에 나가서 복무하였고, 일부는 교대로 서울에 올라와서 복무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군과 지방군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지방군은 의무 병역으로 징발된 군인이지만,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를 받게 되어 있어서, 벼슬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중앙군은 시험에 의해서 선발된 정예 부대, 왕족과 공신의 자제, 또는 고급 관료의 자제들로 구성된 고급 군인들로서, 비교적 높은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한편, 정규군 이외에 잡색군(雜色軍)이라는 예비군이 있어서 유사시에 향토 방위를 맡게 하였는데, 여기에는 전직 관료, 향리, 서리, 교생, 노비 등 각계 각층의 장정들이 참여하여, 평상시에는 본업에 종사하고 일정한 기간만 군사 훈련을 받았다.

조선 초기에는 비교적 양인 개병제 원칙이 지켜져서, 세종 전후의 시기에는 정규군이 약 15만 명에서 30만 명 정도, 봉족과 잡색군을 합하여 모두 80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의 장정이 군역을 지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양인 장정의 대부분이 군역에 편제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또한, 군역 대상자를 조사, 등록시키기 위하여 호적 제도와 호패 제도가 강화되었다.

세조 이후로는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를 실시하여 전국 군현을 지역 단위의 방위 체제로 편성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병력이 증강되고 군사 훈련이 충실하였으며, 무기가 개량되고 군량미도 풍족하여 국방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 영토를 확장하고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국방력 증강에 힘입은 것이었다.

통치 조직

조선 왕조는 체계적인 기본 법전으로서 경국대전을 만들고 법전에 준거하여 정치를 시행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는 수준 높은 법치 국가로 한 걸음 전진하였다.

경국대전 체제는 동양 전래의 6전 제도와 군주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그것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한 점에서 독자성을 가진다.

중앙에는 의정부라는 특유한 기구를 두어, 재상의 합의를 통해서 정책을 주도하게 하였다. 재상권과 합의제의 발달은 우리 나라 정치 제도의 한 특색 있는 전통으로 내려온 것으로서, 정책의 최고 결정권은 국왕에게 있었지만, 재상의 합의를 거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제도였다.

6조 및 6조에 딸린 여러 속관(屬官)은 직능별로 행정을 분담하였으나, 고급 행정 관원은 정책 결정에도 참여하여 기능적 분화와 통일성을 조화시켰다.

정책 결정과 정책 집행 과정의 착오와 부정을 막기 위하여 언관(言官)으로서 사간원을 독립시키고, 감찰관으로서 사헌부를 두었다. 또한, 정책 결정과 행정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홍문관(집현전의 후신), 예문관, 춘추관을 두고, 군주와 대신이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학술과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經筵) 제도를 두었다. 이 밖에, 정책 결정 과정에 여론을 반영하기 위하여 상소 제도가 확대되었다. 언론, 학술, 감찰관의 기능은 조선 왕조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가장 우수하고 강직한 신하에게 맡겼다.

조선 왕조는 백성에 대한 향리나 토호의 사적 지배를 막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인구와 토지를 기준으로 지방 제도를 재정비하고,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여 직접 군현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군현 아래에는 면, 리, 통을 두고, 향민 가운데서 그 책임자를 선임하여 수령의 명령을 집행하게 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권은 향촌의 말단에까지 미칠 수 있었다.

한편, 향리들을 수령 밑에 예속시켜 그 권한을 축소시키고, 향촌의 덕망 있는 인사들로 유향소를 구성하여 수령을 감시 또는 보좌하면서 지방 행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또, 서울에는 경재소(京在所)1)를 두어 유향소와 정부 사이의 연락 기능을 맡게 함으로써 정부와 향촌을 직접 연결시키고, 유향소를 중앙에서 직접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향촌 자치를 허용하면서 중앙 집권을 효율적으로 강화시킬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된 것은, 백성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커진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백성이 지방 세력가의 임의적인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뜻한다.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서 교통과 통신, 그리고 운수 조직이 정비되어 물자의 수송과 통신 연락, 그리고 관민의 여행이 보다 신속하고 편하게 된 것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경제 구조

고려 후기에 국가의 재정이 파탄되고 민생이 피폐했던 경험을 살려서, 조선 초기에는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경제 구조를 개편하였다.

먼저, 농업 생산을 높이기 위해서 토지 개간, 수리 시설 확충, 종자 개량, 농업 기술 혁신 등에 주력하였다. 북방 개척과 해안 지방의 개간, 그리고 내지의 황무지를 적극 개간하여, 국초에 100만 결 정도에 지나지 않던 농지가 세종 때에는 160만 결로 늘었다. 그리고, 저수지는 조선 초기에 수천 개소에 이르고, 경상도에만도 622개소가 있었다. 또, 바람과 가뭄에 강하고 일찍, 수확되는 벼 품종들이 새로 개발되고, 거서(秬黍)라는 새 곡식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영농 기술이 크게 발전되어 모내기법이 남부 지방에서 보급되고, 보리와 벼의 2모작이 일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시비법의 발달로 휴경지가 없어졌으며, 면화 재배가 확대되고 각종 원예 작물과 과수의 재배가 널리 퍼졌다.

이러한 농업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단위 면적당 수확량도 크게 늘었다. 즉, 고려 말기에는 1결의 수확량이 200~300두에 지나지 않던 것이, 세종 때에는 최하 400두에서 최고 1200두까지 올라갔다.

1결의 면적
    연대
등급
인조 12년 이전 인조 12년 이후
1 등전 2,753 평 3,117 평
2 등전 3,247 평 3,667 평
3 등전 3,932 평 4,453 평
4 등전 4,724 평 5,667 평
5 등전 6,897 평 7,793 평
6 등전 11,036 평 12,468 평

한편, 과전법의 성립으로 수확의 50%를 바치던 병작 반수(竝作半收)가 금지 되고, 1결마다 최고 30두까지 받게 하여 조세 부담이 가벼워졌다. 그것도, 세종 때에는 전세율을 더 낮추어 1결마다 최고 20두, 최저 4두를 받아들이되, 토지를 6등급으로, 풍흉의 정도를 9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에 차등을 두었다. 일부 토지에서는 아직도 병작 반 수제가 남아 있었지만, 지주들의 횡포는 전보다 줄어들었다.

국민의 조세 부담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토지 조사 사업을 20년마다 실시하여 양안(量案)이라는 토지 대장을 작성하였다.

토지 결 수   

농민이 바치는 전세, 공물, 국역이 국가 수입의 대종을 이루고, 그 밖에 염전, 광산, 산림, 어장을 국가가 경영하여 얻은 수입과 상인, 수공업자 등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세는 국가 수입의 보조원이 되었다. 국가는 수입의 일부를 비축하고, 나머지는 왕실 경비(상공), 공공 행사비(국용), 관리의 녹봉, 군량미, 빈민 구제(의창), 의료비 등으로 지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국가 수입이 늘고 식량 비축에 힘써서, 세종 때에는 400~500만 석의 곡식을 보유하게 되어 국가 재정이 충실하였다.

한편, 수공업과 상업에 대해서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간여하여, 국가와 국민에게 다 같이 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활동을 규제하였다. 전국의 전문적인 수공업자〔匠人〕들을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소속시켜, 일정한 기간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제조하게 하였다. 농민이 군역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공업자도 국역으로서 물품을 제조, 납품하였으며, 그 대신 근무 기간에 일정한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국역이 끝나면 자유 활동이 허용되어 여러 가지 생활 필수품을 제조, 판매하였다. 관청 수요품은 무기, 화약, 활자, 의복, 문방구, 그릇 등 160여 종에 달하였으며, 6500여 명의 수공업자들이 분업적으로 물품을 제조하였다.

상업도 작은 규모의 판매는 자유롭게 허락하였으나, 규모가 큰 것은 점포의 크기, 상품의 종류, 수량, 가격, 도량형 등을 국가가 규제하여 통제하였다. 서울 중심가(운종가)에는 규격이 통일된 점포(시전)가 건설되어 90여 종의 상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였는데, 그 중에서 비단, 무명, 명주, 모시, 종이, 어물을 파는 점포가 가장 융성하였으며, 이를 6의전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상인들은 독점 판매권을 받은 대신, 국가에 대하여 관수품을 바칠 의무가 있었다.

지방의 일부 도시에도 시전이 있었다. 또, 지방에는 보부상이라는 관허 행상단이 있어서 생활 필수품들을 향촌에 팔았다.

광산2), 어장3), 산장(山場) 등도 작은 규모는 개인 경영이 허락되었으나, 큰 것은 국가가 경영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는 모든 경제 활동을 국가가 조정하여 국가 수익이 크게 늘고, 백성의 경제 생활도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력의 성장보다는 자급 자족에 치중하였던 까닭에 대외 무역과 국내 상업은 부진하였고, 화폐 유통도 활발하지 못했다.

1) 경재소는 조선 초기 지방 관청의 서울 출장소로, 선조 때에 폐지되었다.
2) 전국의 철장(鐵場)은 세종 때에 60개소에 이르렀다.
3) 세종 때의 전국의 어장은 약 400개소에 이르고, 소금을 만드는 염장(鹽場)은 고려 말기의 약 3배에 달하는 1626개소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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