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림의 성장과 사화, 당쟁
사림의 성장
조선 왕조의 문물 제도가 완성된 성종 때를 고비로 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을 사림파라고 부른다.
사림의 연원은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와 길재에 거슬러 올라간다. 길재가 고향 선산에 내려가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더니, 김종직에 이르러 그 수가 부쩍 늘어 영남 일대에 큰 지방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들의 학풍은 관학의 학풍과는 달라서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성리학에 대한 신봉이 깊었다. 사림에서는 성리학 외의 학문과 사상을 이단으로 배격하고, 공리 사상에 바탕을 둔 부국 강병을 반대하였으며, 군사학과 기술학을 천시하였다. 그들은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고, 학술과 언론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희구하였으며,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보다는 향촌 자치제의 발달을 기대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국내, 국외 정세는 중앙 집권과 부국 강병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까닭에, 사림의 정치 이상이 실현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인 세조 때에 이르러 중앙 집권과 부국 강병이 지나치게 추구되자, 민심은 차차 사림 쪽으로 기울었다. 더우기, 세조를 도와 많은 공을 세웠던 훈구 대신들이 권력과 재산을 모으자, 사림은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사화의 발생
정치적 갈등은 성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숭상하였기 때문에, 문물을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해 그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학식과 덕행을 겸비한 참신한 인재가 많이 발탁, 등용되었다. 특히, 영남 사림들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들은 사림파를 형성하여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 세력과 대립하였는데, 학통과 출신 지방이 서로 달랐고 학문적,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절의를 숭상하고 성리학의 정통적 계승자로 자부하였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부국 강병 정책과 사장(詞章) 중심의 학풍을 비판하고, 유향소를 비롯한 향촌 자치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갈등은, 물론 훈구파 지배하에 현실 사회의 모순이 많이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훈구파가 권력을 강화하고 농장을 더욱 확대하여,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사림들의 세력 기반을 많이 침해하였던 것이다.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은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 때에 표면화되었다. 연산군의 실정을 계기로 일어난 무오사화,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사화로 사림들은 커다란 화를 입었으나, 중종 반정을 계기로 중용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은 그들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맞기도 하였다.
조광조 등은 사림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을 무시험으로 등용하고, 훈구 대신(반정 공신)이 가진 토지의 몰수와 위훈 삭제를 주장하며 균전론을 내세워 토지 소유를 다시 조정하려 하였다. 또한, 그들은 불교, 도교와 관련된 종교 행사의 폐지와 공납 제도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주장하고, 소학과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성리학적 윤리와 향촌 자치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사림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높여 주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여망에도 어느 정도 부합되는 점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개혁을 일시에 달성하려는 조급함을 드러내어 마침내 중종과 남곤, 심정 등 공신들의 역습을 받아 조광조와 그 일당은 몰려나고 말았다(기묘사화).
한편, 조광조 등의 젊은 사림이 몰려난 뒤에 권신들의 정권 다툼은 외척 간의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였다(을사사화).
당쟁의 발생
거듭되는 사화에 의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사림은 이미 향촌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의식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선조 때에는 마침내 조정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준경, 이이 같은 저명한 사림들이 이 시기에 중용되었다.
그러나, 사림이 승리하자 사림 간에 또 대립과 반목이 나타났는데, 선조 때에는 지위가 높고 경제력이 우세한 사림이 서인 세력을 형성하고, 정치력, 경제력이 미약한 젊은 사림이 동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 많았고, 동인에는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이 연합되었다.
이와 같은 당쟁은, 처음에는 학문과 이념의 차이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폐단이 크지 아니하였고, 도리어 사림의 정치 참여를 넓히는 기능도 가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리 민복보다는 사당(私黨)의 이익을 앞세우고, 이념보다는 학벌, 문벌, 지방 의식과 연결되어 국민을 분열시킴으로써 국가, 사회 발전에 지장을 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