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 중기의 사회 변동
서원과 향약
사림이 득세하기 시작한 16세기에는 향교를 중심으로 한 관학 교육이 쇠퇴하고, 사림이 설립한 서원(書院)이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설치된 서원은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임진왜란 이후로 서원은 급속히 증가하여 18세기에는 700여 개소를 헤아렸고, 고종 때에는 약 1000개소에 이르렀다. 국가에서는 그 중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큰 서원들에 토지와 노비, 그리고 서적을 지급하여 서원 세력을 지원하였다.
서원은 본래 선현을 제사, 추모하며, 자제들을 교육하는 교학 기관으로 출발하여, 교육 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뒤에는 사림이 향촌 사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지방 조직의 하나로 변질되어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즉, 서원을 통해서 토지를 집적하고, 족당이나 학파, 당파의 결속을 강화함으로써 당쟁에서의 정치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또한, 서원을 거점으로 여러 자치 조직을 운영함으로써 향촌에서의 지배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사림은 서원에 들어감으로써 양반의 지위를 보장받고, 국가의 각종 부담을 면제받았다.
따라서, 서원의 폐단은 차차 고려 시대 불교 사원의 폐단과 비슷한 양상을 드러냈다.
한편, 사림은 향촌 사회를 교화하고 향민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향약을 널리 보급, 실시하였다. 원래, 농촌에는 부락 단위로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 생활을 같이하고, 도덕을 서로 권장하며, 재난과 어려운 일을 당하여 서로 단결하여 도와 주는 미풍 양속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 공동 조직을 계승하고, 여기에 삼강 오륜의 윤리를 가미하여 신분 질서 유지에 알맞게 재구성한 것이 향약이다.1)
따라서, 향약은 지역에 따라 그 성격이 조금씩 달랐으나, 대체로 향약의 간부는 향안(鄕案)에 오른 사림 양반 중에서 선임되었고, 유향소나 서원을 향약 독회 장소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또, 사림은 향약을 통해서 향민에게 유교 도덕을 가르치고, 어려운 일을 서로 도와 주며, 규약을 어기는 자는 일정한 제재를 가하고 심한 경우에는 동리에서 추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향약이 보급될수록 사림의 지위는 한층 강화되고, 상대적으로 농민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양반 문벌의 형성
사림이 성장하던 16세기에는 신분 계층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초기의 신분제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양반, 중인, 상민, 노비의 네 신분이 새로이 형성되어 갔다. 그러나, 중인은 그 수가 적고, 상민과 노비는 그 지위가 서로 비슷해져서 구별이 뚜렷하지 않아, 크게 양반과 상민으로 갈라졌다.
양반은 사림이 그 중추 집단을 형성하였다. 본래 중앙에서 벼슬하고 있는 문무 관료를 합칭하던 양반이라는 말은, 벼슬할 자격이 있는 고급 신분을 가리키는 뜻으로 바뀌었다.
양반은 다른 신분과는 혼인이나 교제를 하지 않았고, 대개 지주로서의 생활 기반을 가져서 스스로 농업, 수공업, 상업 등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학문을 업으로 삼아 스스로 유학(幼學), 사림, 유생이라고 자처하였다.
서원은 양반의 기본적인 교육 도장이 되었는데, 양반의 학생 명부를 청금록이라 불렀다.
양반은 학생의 신분을 가진 까닭에 군역이 면제되었다. 또, 양반은 경학만 공부하여 소과나 대과(문과)를 거쳐서 문반 관료로 나가고, 무과나 잡과와 같은 기술직은 기피하였다. 따라서, 기술직은 중인의 세습직으로 되어 갔다. 양반은 또한 서얼을 차별하여 벼슬길을 제한하였다.
한편, 양반층이 강화됨에 따라 평민의 지위는 하락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토지 겸병이 진전됨에 따라 농민들은 차차 병작농으로 바뀌어 가고, 평민으로서 노비가 되는 사례가 많아졌다. 평민의 교육 기회가 축소되고, 그에 따라서 벼슬길도 좁아졌다. 그들이 양반과 경쟁하여 고관 대작을 얻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위에 양반이 지지 않는 부담까지 떠맡게 되어 국가에 대한 의무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러므로, 평민과 노비의 구별은 별로 크지 않게 되었다.
토지 겸병과 공납, 부역의 증가
세조 때에 실시된 직전법이 명종 때에 이르러 폐지됨에 따라, 황실과 관료들은 사유지에 대한 욕구가 커져서, 매입, 개간, 탈취 등의 방법을 통해서 토지를 축적하게 되었다.
왕실은 내수사(內需司)를 통해서 토지와 노비를 모아들이고, 장리 사업을 벌였으며, 왜란 이후에는 황무지를 불하하거나 일반 민전을 사들여서 수만 결의 토지를 차지하였다.
국가의 각 관청도 군량미와 자체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둔전(屯田)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고, 양반 관료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토지를 모으고, 향촌의 사림 양반들은 서원을 통해서 토지를 집적하였다.
이와 같은 토지 겸병의 진전은 국가의 수입을 감소시키고, 농민의 생활을 점차 곤궁하게 만들어 갔다. 전세가 1 결마다 4두로 크게 줆에 따라 국가 수입만 떨어졌을 뿐, 지주에게 수확의 반을 바쳐야 하는 농민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돌아가지 않았다. 16세기 이후로는 국가의 비축 곡식은 20~50만 석에 지나지 않아, 그 해의 경비를 지출하기에도 급급하였다.
16세기 농민의 부담 가운데서 가장 무거운 것은 공납이었다. 왕실과 관료의 사치로 공물의 액수가 늘고, 수납 과정에도 방납2)의 폐단이 생겨났다. 이이가 공납을 쌀로 대신 내게 하는 수미법을 주장한 것은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농민의 군역 부담도 더욱 힘겨워졌다. 성종 때 이후로 군역이 점차 요역으로 바뀌면서, 군사들이 보인에게서 받은 조역가(助役價)로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시키는 대립제(代立制)가 나타났는데, 그 삯전은 10~20필(면포)에 이르렀다. 중종 때에는 이러한 대립제를 확대하여 모든 장정에게서 군포(軍布)를 받아들여, 그 수입으로써 군대를 모집하였다. 이리하여, 군역은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켜 농민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군대의 질을 저하시켰다.
한편, 빈민 구제 사업으로 실시되던 의창제가 16세기에 가서는 거의 유명 무실해지고, 물가 조절을 위해 실시되던 상평창 제도도 원곡의 10%를 받게 되어 있는 이자가 점점 고리대로 변하여 갔다.
이러한 공납, 군포의 부담과 더불어 환곡 제도의 폐단은 민생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16세기 말의 학자 이이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려고 변법경장을 주장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농촌이 피폐해짐에 따라 각지에서 유민과 도적 떼가 발생하였는데, 명종 때에 황해도에서 일어난 임꺽정 일당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