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제의 변화
전세의 변화
왜란 직후에 전국의 토지 결 수는 왜란 이전의 전라도의 토지 결 수와 같은 수준으로 격감되었는데, 가장 피해가 심했던 경상도는 약 6분의 1로 감소되었다. 토지의 황폐와 토지 대장의 소실 등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왜란이 끝난 뒤로 다시 진전이 개간되고 양전 사업이 실시되면서 토지 결 수는 점차 늘었다. 광해군 때에는 54만 결, 인조 때에는 120만 결, 숙종 때에는 140만 결, 그리고 영⋅정 때에는 최고 145만 결까지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거의 세종 때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이었다.
그러나, 토지 결 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전세 수입은 별로 늘지 않았다. 국가의 수세지는 전체 결 수의 약 60%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나머지는 궁방전이나 관둔전 등 면세지였고, 효종 때 전세 제도가 개편되어 전세율이 1결마다 4두로 경감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전세는 지주가 부담하는 경우도 있고 병작 농민이 부담하는 경우도 있어서, 전세율의 저하가 반드시 농민에게 이득을 준 것은 아니었으나, 농업 생산을 증진시키는 촉진제가 된 것은 사실이었다.
수세지와 수세율의 감소로 국가의 전세 수입이 현저히 줄었는데, 16세기에는 전세 수입이 매년 약 20만 석이었으나, 17세기에는 8만여 석으로 줄었다. 그리하여, 전세 수입의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여러 가지 부가세를 징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동법
지방의 토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공물 제도는, 본래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아서 조선 초기부터 방납(防納)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방납자의 농간으로 방납 제도는 국가 수입을 축내고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이러한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노력이 16세기에 이미 조광조, 이이, 유성룡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그 후, 17세기 초에 이원익, 한백겸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경기도에서 먼저 수미법을 시행하여 종전에 바치던 상공을 쌀로 받게 하였다. 이 때, 1결당 16두씩을 대동미라는 이름으로 징수하고, 이 법을 대동법(大同法)이라고 불렀다. 대동법은 호를 단위로 하지 않고 토지 결 수를 단위로 한 까닭에, 토지가 많은 지주들의 부담이 커지고 국가의 수입은 상대적으로 늘게 마련이었다.
대동법은 조익의 주장에 따라 강원도에서도 실시되고, 17세기 중엽에는 충청도, 전라도에서도 실시되어 1결마다 13두를 받았으며, 18세기 초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되어, 대동미의 세액도 12두로 통일하였다. 산간 지방에서는 쌀 대신에 가벼운 베나 돈으로 받았다.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어 민생 안정에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국가는 수십만 석의 대동미를 받아들임으로써 전세 수입의 부족을 메울 수 있었고, 그 수입으로써 공인(貢人)이라는 상인들에게 공가를 지불하고 필요한 관청 수요품을 조달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공인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자본가가 생겼고, 공인의 주문에 따라 수공업 생산이 활기를 띠었으며, 삼랑진, 강경, 원산 등이 쌀의 집산지로서 상업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 후에도 별공(別貢)과 진상(進上)은 그대로 남아, 현물 징수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아니하였다.
균역법
임진왜란 중에 훈련도감이 설치되어 3수병을 훈련하고, 호란을 거치는 동안에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 등이 새로이 마련되어, 숙종 때까지 이른바 5군영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속오군(束伍軍)이 편성되었다. 이 중에서 중앙군은 대개 국가에서 급료가 지불되는 소모군(召募軍)이었으며, 지방의 속오군은 경비를 자담하였다.
그런데, 소모군의 경비는 양인 장정이 바치는 군포에 의해서 충당되었다. 군포는 원칙적으로 장정 수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었지만, 국가는 군포의 총액을 미리 정해 놓고 이것을 마을 단위로 할당하여 부과하였기 때문에, 각 마을은 장정 수보다 훨씬 많은 군포를 연대 책임으로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양반이 물지 않은 군포나, 이웃이나 친척이 물지 않은 군포까지 떠맡아야 하고, 이미 죽은 사람이나 어린애에 대해서조차도 군포를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장정이 2필을 바치도록 되어 있는 군포를 실제로는 그 몇 배를 물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포의 폐단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가장 심하여, 농민의 부담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에 대한 시정책이 일찍부터 논의되다가, 영조 때에 균역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종래에는 16개월마다 받던 군포 2필을 12개월마다 1필로 절감하였다. 포 1필은 쌀 6~12두에 해당하였다. 국가는 절감된 군포의 수입을 다른 방법으로 보충해야 했다. 그래서, 종래 군역이 면제되었던 일부 상류 신분층에게도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는 이름으로 군포 1필을 부과시켰다. 그리고, 지주에게서 토지 1결마다 미곡 2두(또는 미곡 대신 5전)를 결작(結作)이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였다. 또, 종래 각 아문이나 궁방에서 받아들이던 어세, 염세, 선세를 균역청에서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국가의 수입은 줄지 않으면서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종전보다 다소 가벼워졌고, 종전에는 군포를 면제받던 양반이나 지주들이 군포와 결작의 부담을 지게 되었으므로, 군역은 어느 정도 평준화되었다. 그러나, 이 법도 그 후 결작을 농민이 부담하게 되었고, 군액 수가 늘어남에 따라 족징, 인징 등의 폐단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군역을 모면하기 위하여 농토를 버리고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다소 경제력이 있는 사람은 양반의 신분을 사기도 하였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양반이 급속도로 늘어난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