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산업의 발전과 신분제의 변화
농업의 진흥
왜란과 호란으로 피폐된 농업은 17세기 후반 이후로 급속히 복구, 발전되었다. 왜란 직후의 대장(양안)에 등록된 토지 결 수는 54만 결에 지나지 않았으나, 18세기 초에는 약 140만 결로 늘었다. 그러나, 이 밖에 토지 대장에 누락된 토지가 상당수 있어서 실제의 토지 결 수는 양안의 수치를 훨씬 능가하였다.
경지 면적의 확장과 동시에 수리 시설도 크게 개선되었다. 제언사가 설치되고, 제언절목을 반포하여 수리 시설의 개인 독점을 금지하는 동시에, 많은 제언을 수리 또는 신축하였다.
그 결과, 18세기 말에는 큰 저수지(제언)가 3529개소, 작은 저수지(보)가 2265개소에 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수원의 서호, 김제의 벽골제, 홍주의 합덕제, 연안의 남대지 등은 가장 큰 저수지로 꼽힌다.
수리 시설의 확장으로 수전 농업을 발전시켜 밭농사를 논농사로 바꾸어 가게 되었고, 모내기법(이앙법)이 더욱 보급되었다. 이앙법으로 풀뽑기에 필요한 노동력이 절감되고,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높였을 뿐 아니라, 모내기 이전에 보리를 심을 수가 있어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二毛作)이 가능하게 되었다.
밭농사에 있어서도, 밭고랑과 밭이랑을 만들어 밭고랑에 곡식을 심는 견종법(畎種法)이 널리 보급되어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이와 같이, 이앙법과 견종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됨으로써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경지 면적이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한 집에서 넓은 토지를 스스로 경영하는 광작(廣作)이 나타났다.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들은, 구태여 병작을 하지 않고도 고공(머슴)이나 노비를 부려서 광작을 하면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가난한 농민들은 병작지를 얻기가 더욱 힘들어졌으므로, 농토를 떠나 노동자나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국, 이앙법과 광작의 확산은 토지의 집중과 농촌 사회의 분화를 촉진하여, 점차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한편, 18세기에는 상품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업 분야에서도 상품화를 전제로 하는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인삼, 담배는 가장 인기 있는 작물로서, 인삼은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각지에서 널리 재배되었고, 담배도 17세기 초에 일본에서 전래된 후로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재배되었다. 서울 근교에서는 채소 재배가 성하였고, 그 밖에 피마자, 면화, 약재, 고추, 호박, 과실 등도 인기 있는 상업 작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기근에 대비한 구황 작물의 필요성이 높아져서 고구마, 감자가 널리 재배되었다. 고구마는 조엄이 일본에서 가져오고, 감자는 청에서 종자를 얻어 왔다.
농업의 발달에 따라 많은 농서가 출간되었다. 특히, 강필리, 김장순 등은 고구마 재배법을 깊이 연구하여 감저보, 감저신보 등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효종 때 신숙은 농사직설, 금양잡록 및 기타 농서들을 묶어서 농가집성을 편찬하였다. 숙종 때 홍만선은 농사와 의약에 관한 지식을 모아서 산림경제를 펴냈고, 영조 때에는 유중림이 이를 증보하여 증보산림경제를 편찬하였다. 그 후, 19세기 중엽에 서유구는 농업에 관한 지식을 집대성하여 임원경제지라는 방대한 백과 사전을 편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병작인이 지주에게 바치는 지대(地代)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지주와 작인이 수확을 반씩 나누는 타조법(打租法)은 조선 후기에도 그대로 관행되었으나, 호남 지방에서는 전세와 종자, 그리고 농기구를 작인이 부담하게 되어 다른 지방의 작인들보다 불리한 조건에 있었다.
또한, 일부 지방에서는 풍흉에 관계 없이 해마다 일정한 양을 지대로 바치는 도조법(賭租法)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도조법은 대개 수확량의 약 3분의 1을 지주에게 바치게 되어 있기 때문에, 타조법보다 작인에게 유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도지권은 작인이 토지를 개간했거나 제방을 쌓거나 매수하였을 때에 성립하는 것이었으므로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지권을 가진 작인은 그 토지를 매매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도지권을 가진 농민은 지주에 대하여 보다 자유스러운 관계를 가지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수공업과 광업의 발달
관장이 중심이 된 조선 초기의 관청 수공업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였다. 무기, 종이, 활자, 자기, 비단, 유기, 화폐 주조 등의 분야에서는 여전히 관청 수공업이 중심을 이루었고, 그 품질도 매우 우수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2800여 명에 달하던 경공장(京工匠)은, 18세기 후반에 약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외공장(外工匠)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 기관에 전속된 장인이 줄어든 대신, 국가에 장인세를 바치는 납포장(納布匠)은 더욱 늘어서, 18세기 중엽에는 10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공인이나 일반 시장을 상대로 물품을 제조하였으므로 독립 수공업이나 다름없었다.
국가는 공인에게서 물품을 사들이거나, 장인이 바치는 세(포)로써 개인 수공업자를 고용하여 물품을 제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인들의 자본을 끌어들여 수공업 경영에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이 경우, 상인은 원료와 공전(임금)을 선대(先貸)해 주고 제조된 물품을 사들였다.
상인이 물주(物主)로서 수공업자를 지배하는 현상은, 특히 종이, 화폐, 야철, 자기 등의 제조 부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한편, 수공업자 중에는 독립된 자본으로 스스로 생산,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모자, 장도, 솥, 유기(놋그릇) 분야에서는 수공업자가 상인과 경쟁하여 독자적으로 물품을 제조, 판매하는 사례가 많았다.
전문적 독립 수공업자들이 제조하는 물품은 놋그릇, 자기, 철기, 죽기, 목기 등의 그릇류와, 비단, 갓, 먹, 종이, 부채, 빗과 같은 일용품, 그리고 무기, 화약, 농기구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안성과 납청(평안도 정주)의 놋그릇, 통영의 칠기, 해주의 먹, 전주의 부채, 나주의 종이, 영암의 빗 등이었다. 이 밖에, 여자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생산하는 마포(베), 저포(모시), 명주, 면포(무명) 등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크게 발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광업을 국가가 경영하여 사적인 광산 경영을 막았으나, 점차 사채(私採)를 허용하면서 세금을 받아 내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광산의 개발이 촉진되었는데, 특히 대청 무역에서 은의 수요가 늘어 감에 따라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에는 근 70개소 가까운 은점(銀店)이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부터는 농민들이 광산에 너무 모여들어 농업에 지장을 주는 것을 고려하여 공개적인 채취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상인들은 광산 개발이 이득이 많았으므로 금광, 은광을 몰래 개발하여 이른바 잠채(潛採)가 날로 번창하여 갔고, 큰 자본을 모은 이도 발생하였다.
금⋅은광만큼 활기를 띠지는 않았으나, 놋그릇과 무기, 그리고 구리돈 주조의 원료로서 동광 개발이 촉진되고, 화약 제조의 원료인 황 광업도 중요시되었다.
상업과 대외 무역의 발달
시전 상인과 공인의 상업 활동이 활기를 띰과 동시에, 난전(亂廛)이라 불리는 사상들의 활동도 힘있게 전개되어 상호간에 활발한 경쟁이 일어났다. 시전 상인들은 난전을 금압하는 금난전권을 가지고 독점 판매를 하였으나, 사상의 줄기찬 성장을 막을 길이 없어서, 18세기 말에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였다.
이로써 많은 시전 상인들은 사상과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난전 상인들도 육의전의 물종이 아닌 것은 자유로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서울의 상가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이현(동대문 안), 칠패(남대문 밖), 종루(종로 근방)에 새로운 상가가 번창하여 시전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한편, 시전 상인이 사상의 침식을 크게 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인들의 활동은 사상의 침해를 별로 받지 않고 번창하였다. 공인은 대개 시전 상인(시인)이나 경주인, 장인 중에서 되었으며, 그들은 선혜청이나 상평청, 진휼청, 호조 등에서 공가(貢價)를 받아 소요 물품을 사서 관청에 납품하였다. 공인은 국가에 대한 국역으로서, 국가에 세금을 바쳤다.
사상들은 난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17세기 후반부터는 서울의 변두리와 지방에서도 한강을 중심으로 운수업에 종사하여 자본을 모은, 이른바 경강 상인(京江商人)의 활약이 컸다. 즉, 그들은 미곡과 어물의 수송과 판매를 통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다.
또, 개성의 송상들은 전국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차려 놓고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참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한편, 15세기 말에 전라도 지방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장시(場市)도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8세기 중엽에는 1000여 개소의 장시가 개설되었다. 장시는 보통 5일마다 열려서 인근 주민들이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 등을 교환하였고, 보부상(褓負商)이라는 행상단이 먼 지방의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팔았다. 특히, 항구를 낀 장시에서는 대규모 교역이 행해져서, 도매업과 위탁 판매업, 창고업, 운송업, 숙박업 등에 종사하는 객주나 여각 등이 나타났고, 거래를 붙이는 거간까지 생겨났다. 객주나 여각은 자금의 대부와 어음 발행, 예금 등의 은행업도 겸하여, 지방 상업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장시가 발달함에 따라 그 중의 일부는 상업 도시로 성장해 갔고, 도로도 많이 개척되었으며, 수상 운수도 일정하게 발달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장시 가운데서 강경, 전주, 대구, 안동 등이 유명하였으며, 새로운 상업 도시로서 성장해 갔다.
국내 상업의 발달과 때를 같이 하여 대외 무역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하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인 무역과 사적인 무역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청에서 들여 오는 물품은 비단, 모자, 약재, 말, 문방구 등이었고, 이 곳에서 수출하는 물품은 은을 비롯하여 각종 가죽, 종이, 무명 등이었으며, 19세기 이후로는 인삼(홍삼)이 대종을 이루었다.
한편,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대일 무역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인삼, 쌀, 무명 등 국산품을 팔고, 또 청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넘겨 주는 중개 무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으로부터는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여 은을 다시 청에 수출함으로써 중간 이득을 취하였다.
이러한 국제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개성의 송상과 의주의 만상, 그리고 왜관의 내상이었다.
대외 무역의 결과로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외화를 획득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수입품 중에는 사치품이 많고, 수출품 중에는 은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국가 재정과 민생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던져 주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큰 상인들은 시전 상인이나 난전 상인, 그리고 공인이나 지방 상인을 불문하고, 독점적인 도매업의 방법을 써서 물품을 염가로 매점하여 고가로 판매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흔히 도고(都賈)라고 불렀다.
도고의 성장은 농업에 있어서 광작(廣作)의 유행과 비교되는 새로운 경제 현상으로서, 후자가 농민의 계층 분화를 촉진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전자는 상인의 계층 분화를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화폐의 유통
상공업의 진흥에 따라 화폐에 대한 수요가 커지게 되어, 인조 때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구리돈이 주조되기 시작하여 17세기 말에는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금속 화폐의 대종을 이룬 것은 은이었으며, 그 밖에 쌀과 포목 등이 현물 화폐로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구리돈은 보조적 기능밖에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서서 대동미와 기타 세금이 금납화되어 가고, 지대도 화폐로 지불되기 시작하면서, 구리돈의 사용이 일차적인 유통 수단이 되었다.
금속 화폐의 보급은 상품 유통을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상인이나 지주들은 늘어난 재산을 화폐로 바꾸어 저장해 두고, 그 화폐를 대여하여 쉽게 재산을 늘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구리돈이 많아질수록 구리돈은 더욱 퇴장되어 유통 화폐의 부족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전황(錢荒)이라 한다.
전황 문제는 18세기 중엽 이후로 심각하게 대두되어, 실학자 이익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은 화폐의 긍정적 기능과 동시에 그 부정적 기능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신분제의 변화
조선 초기의 신분제는 16세기경부터 서서히 붕괴되면서 양반, 중인, 상민, 노비로 분화되어 갔다. 이와 같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는 조선 왕조 말기까지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 유지되었으나, 19세기를 전후해서는 양반 인구가 늘고 상민과 노비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가 나타났다.
양반이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상민들이 군역을 모면하기 위하여 족보를 위조하기도 하고, 직첩을 사기도 하였으며, 학생을 사칭하기도 하고, 양반과 혼인을 하여 양반 신분을 획득한 까닭이었다. 그것은, 상민의 부담 가운데서 군역 부담이 가장 무거웠기 때문이었으며, 또 한편 상민 가운데서 재산을 모은 자가 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양반이 늘어남에 따라, 양반 내에는 복잡한 계층이 생겼다. 위로는 집권당파의 권세 있는 양반이 있는가 하면, 향촌 사회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향반(鄕班) 또는 토반(土班)이 있고, 또 그 밑에는 중앙 정계에서는 물론 향촌 사회에서도 별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하층 양반도 있었다. 따라서, 양반이라 해서 모두가 권세가 있고 재산이 많으며 학식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권세와 재산과 학식이 없는 양반들은 상민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한편, 상민과 노비의 구별도 점차 모호해졌다. 양반이 되지 못한 상민들은 관리가 되기가 어려웠고, 국가나 지주에 대한 부담이 커졌으며, 또 그 중의 상당수는 임노동자로 되었기 때문에, 법제상으로는 자유민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노비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또한, 노비들 중에는 도망하거나,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거나, 혹은 국가에 곡식을 바치거나 하여 평민이 되는 자가 늘어났다.
이에, 국가는 평민이 줄어드는 것은 재정상으로도 불리하고 국방상으로도 지장이 있기 때문에, 노비들을 서서히 풀어 주는 정책을 취하였다. 특히,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공노비를 단계적으로 풀어 주어, 순조 때에는 약 5만 명의 노비를 해방시켜 주었다.
물론, 사노비는 공노비처럼 빨리 평민화되지는 못했으나, 옛날처럼 주인(상전)에게 강하게 예속되지도 않았고, 상민과의 결혼도 빈번해져, 그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를 전후해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밑바탕에서부터 흔들리고, 신분 간의 상하 이동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 이동이 정치 권력을 좌우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가운데, 권세 있는 벌열(閥閱) 양반의 지배 체제는 여전히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