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철학의 발달
주리파와 주기파의 논쟁
이황에 의해서 심화된 주리 철학(主理哲學)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집권파 양반들 사이에서 광범한 호응을 얻어 철학 사조의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 문화의 도전을 받고 일본과 여진족의 침략을 겪는 과정에서, 주리설은 점차 이일원론(理一元論)으로 발전되면서 위정 척사 운동의 철학적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 이(理)는 도덕적 원리를 의미하고, 도덕적 원리는 현재의 사회 질서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까닭에, 기성 질서를 지키려는 사림, 양반들은 주리설로 기울었다. 주리설의 대표적 학자는 기정진, 이진상 들이다. 한편, 물질 생활과 기술의 혁신을 중요시하는 주기설(主氣說)은 주리설을 반박하였다. 주기설은 이이 등에 의해서 종합, 정리된 이래로 실학 계열(특히 북학파)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 밖에 한원진, 임성주 등의 학자를 거쳐서 개화 사상가들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중엽의 최한기는 서양의 과학 기술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주기설과 관련된 경험주의 철학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켜 실학 사상의 철학적 기반을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화 철학의 선구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김정호의 지도 제작과 더불어 19세기 중엽의 평민층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으나, 국내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100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가운데 일부만이 명남루 총서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한학과 양명학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동인 학자 중에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더니, 17세기 후반 이후는 남인과 소론 중에서 주자와 다른 경전 해석을 시도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17세기 후반의 남인 학자 윤휴는 4서 3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에 대하여 주자와 다른 주해를 내려서 성리학자들로부터 사문난적, 즉 유학의 반역자라는 규탄을 받았다. 그는, “천하의 많은 이치를 어찌하여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 주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나 맹자가 태어난다면 내 학설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윤휴와 비슷한 시기에 박세당은 사변록과 노자, 장자에 대한 주해서를 써서 성리학에 도전하다가 역시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주자의 해석에 구애되지 않고 고주(古註)를 참작하여 직접 공자, 맹자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은 정약용에 의해서도 시도되어, 성리학과 다른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성리학의 한계성을 극복, 보완하려는 노력은 양명학의 수용으로도 나타났다. 양명학은 주로 강화도를 중심으로 하여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파 학자와 불우한 종친 출신의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남언경, 이요, 최명길, 장유 등에 의해서 관심을 끌기 시작한 양명학은, 18세기 초의 정제두에 이르러 뚜렷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존언, 만물일체설 등을 써서 학문적 체계를 세웠는데, 그의 영향하에 이른바 강화 학파로 불리는 이광려, 이광사, 이충익 등이 배출되었으며, 한말 일제 시대의 저명한 양명학자인 이건창, 이건방도 그 후손이다.
이 밖에도, 겉으로는 성리학을 신봉하면서 내심으로는 양명학을 숭상하는 학자도 적지 않았으나, 성리학을 완전히 극복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양명학은 한말 일제 시대의 김택영, 박은식, 정인보 등과 같은 국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