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학, 예술의 새 경향
문학의 새 경향
왜란과 호란을 겪은 직후인 17세기에는 애국 사상과 사회 비판을 담은 문학 작품이 많이 창작되었다.
애국적인 문학 작품으로는 3학사를 비롯한 척화파 인사들의 시조가 유명하며, 임진왜란에 종군한 경험을 가진 박인로의 선상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의 활약을 소설화한 임진록, 호란 당시 북벌 운동을 계획했던 임경업의 행적을 그런 임경업전 등이 널리 읽혔다.
사회 소설로는 허균의 홍길동전과, 작자 미상의 전우치전, 그리고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이 유명하다. 특히, 홍길동전과 전우치전은 둔갑술을 가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사회 정의의 구현을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를 엮은 것으로, 도교적인 체취를 물씬 풍긴다. 전우치와 비슷한 도인으로서 윤군평에 관한 전기도 널리 읽혔다.
애국적이고 사회 풍자적인 민담들을 모아 놓은 야담, 잡기류의 성행도 주목된다. 차천로의 오산집, 유몽인의 어우야담을 비롯하여 많은 야담, 잡기류가 나오고, 17세기 중엽에는 그 이전까지의 야사, 야담류 57종을 모아 대동야승이라는 책이 엮어져 나오기도 하였다.
한편, 선조 때에는 중국의 설화집을 모은 태평광기의 언해가 이루어져, 설화 문학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켰다. 설화 문학은 서민들의 소박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 작가들의 문학 정신이 서민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하겠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문학 창작의 주체가 양반뿐만 아니라 중인, 서얼, 그리고 상민층으로까지 확대되고, 문학 형식도 훨씬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소설에서는 박지원의 풍자 소설이 가장 주목된다. 열하일기에 실린 허생전과 호질, 그리고 방경각외전에 실린 양반전과 민옹전 등에서 그는 양반들의 위선적인 생활을 풍자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 냄으로써 자신의 실학 정신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는 구습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문체를 개발하여 문체의 혁신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국문 소설도 더욱 많이 창작되어 장화홍련전, 콩쥐팥쥐 등과 같은 권선 징악적인 가정 소설이 널리 애독되었다.
시조, 한시, 가사, 잡가 등의 분야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시조의 형식이 점차 사설 시조로 바뀌면서, 주제도 평민들의 자유 분방하고 소박한 생활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이 많아졌다. 18세기의 서리 출신 시조 작가인 김천택과 김수장은 우리 나라 역대 시조와 가사를 모아 청구영언과 해동가요를 각각 편찬하고, 또한 고시언은 항간 시인들의 시를 모아 소대풍요를 편찬하여 문학사 정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시 분야에서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이른바 4가를 비롯하여 이언진, 박지원 등이 뛰어났다. 잡가는 시조, 가사보다도 평민들 사이에서 더욱 애창되었으며, 그 내용도 매우 솔직하고 해학적이며 풍자성이 짙었다. 잡가의 대표적인 것은 타령, 육자배기, 사랑가, 수심가 등이었다.
19세기 이후로는 판소리와 가곡이 국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판소리는 광대들이 청중을 상대로 소설의 줄거리를 가창(歌唱)과 연극으로 전달함으로써 읽는 소설보다 훨씬 흥미를 돋우어 주었는데,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토끼타령, 적벽가, 가루지기타령은 가장 인기 있는 판소리 사설이었다. 판소리 사설의 창작과 정리에 공이 큰 사람은 19세기 후반의 신재효였다.
중인, 평민의 문학 창작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시사(詩社)가 결성되고, 정수동, 김병연(김 삿갓) 같은 풍자 시인이 일세를 풍미하는 등 19세기는 서민 문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전대부터 내려오던 가면극도 19세기에 이르러 더욱 정리되고 성행되었다. 춤과 노래와 사설이 합쳐진 가면극은 종합 예술의 성격을 띠면서 국민 대중 속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그림의 새 경향
그림에 있어서도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새로운 발전을 보이면서, 윤두서, 정선, 김두량, 변상벽, 심사정, 최북 등 거장이 무리로 나타나더니,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신윤복과 김홍도가 나와 민족 회화의 중흥기를 이룩하였다.
화원 정선은 중국 산수를 모방하던 종전의 화풍을 배격하고, 바위산이 많은 우리 나라의 자연을 그려 내는 데 알맞은 새로운 산수화를 개척하였다. 이른바 진경 산수화(眞景山水畫)로 불리는 그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인왕산 그림과 금강산 그림은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화원 김홍도는 처음에 신선도를 즐겨 그리다가, 뒤에는 산수화와 풍속화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산수화는 정선과 마찬가지로 진경을 묘사하는 데 주력하였으나, 정선이 우리 나라 자연의 정적인 중량감을 표현하는 데 독창성을 보인 것과는 달리, 예리한 붓줄로써 한국 산수화의 또 다른 정형을 세워 놓았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밭갈이, 추수, 집짓기, 대장간, 서당, 씨름, 풍악놀이 등, 농촌 서민들이 서로 협동하면서 일하고 함께 즐기는 순박하고 낙천적인 18세기 농촌의 생활상을 유감 없이 그려내고 있다.
풍속화가로서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는 신윤복은 주로 도회지 양반의 풍류 생활과 부녀자들의 풍습을 서정적이며 풍자적인 필치로 묘사하여, 김홍도와 대조를 이루었다. 또, 그 기법에 있어서도 김홍도처럼 간결하고 투박한 필치보다는 섬세하고 세련된 필치를 구사하였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배경인 산수를 대담하게 생략한 것과는 반대로, 그는 반드시 산수를 배경으로 한 풍속화를 그렸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다. 김홍도와 비슷한 경향을 지닌 풍속화가로서는 김득신, 김석신 형제가 있었다.
한편, 18세기 말 이후로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화풍이 개발되었는데, 강세황과 김수철의 그림, 그리고 작자를 알 수 없는 투견도가 그러한 계통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에 들면서는 실학적인 화풍이 시들고, 그 대신 복고적인 문인 화풍이 다시 풍미하였다. 김정희와 이하응, 신위, 장승업 등은 19세기를 대표하는 명장들이었다. 세한도로 대표되는 김정희의 산수화는, 진경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높은 이념 체계를 표현한 것이었다.
이하응은 김정희와 더불어 난초 그림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그리고, 신위는 대 그림의 제일인자로 명성이 높았고, 장승업은 안견,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3대 화가의 하나로 꼽히는 천재적 화원으로서, 사실적이고 생동하는 필력으로써 새, 꽃, 인물, 산수 등 각 부문에서 많은 걸작을 남겼다.
공예, 건축, 서도
조선 후기에는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分院)을 두고 자기를 생산하게 하여, 분원 자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분원 자기는 청화 백자가 중심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흰 바탕에 푸른 색깔로 그림을 넣은 것으로, 퍽 아담한 정치를 자아냈다. 청화 백자 외에 산화철과 산화구리를 이용하여 붉은색 그림을 넣은 자기와, 여러 가지 장식의 백자를 만들어 그 종류와 기법이 다양하였다.
실용성과 예술성의 조화를 특색으로 하는 조선 후기의 공예는 목공예, 죽공예, 화각 공예 등 여러 분야에서 더욱 세련된 멋과 실용적 다양성을 지니면서 발달하여, 가정의 생활 용구의 전 분야에 걸쳐서 미적 감각을 높이게 되었다.
조선 후기 건축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정조 때 완성된 수원성이다. 정약용의 치밀한 설계에 의해서 축조된 수원성은 돌과 벽돌을 적절히 배합하였으므로, 공학상으로 견고할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성곽 양식과 중국의 성곽 양식을 절충한 특색 있는 성곽 건축이다.
대원군에 의해 재건된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는 말기의 건축을 대표하는 걸작으로서, 웅장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고, 주위의 환경과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서예에 있어서는 김정희가 고금의 필법을 깊이 연구하여 추사체라는 독자의 서체를 창안하여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의 서법은 금석학 연구에 바탕을 두어, 고대의 금석문에서 서도의 원류를 찾아서, 그것을 자기 개성에 맞게 발전시킨 것이었다.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는 전기, 오경석, 오세창, 신헌 등이 유명하였다.
서예와 아울러 도장 예술도 발달하여, 다양한 인각(印刻)이 이루어졌다. 도장에는 자기의 이름, 호, 사상 등을 새기고, 그것을 책이나 글씨, 그림 등에 찍어서 풍아한 정취를 돋우었다.
이 밖에, 별전(別錢)이나 열쇠패와 관련된 금속 공예도 발달하여 우수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별전은 화폐를 주조할 때 기념 화폐로 만든 것으로, 여러 가지 사상과 신앙을 표현하는 글씨와 그림을 넣어 장식품으로 즐겨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