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학 농민 혁명 운동
열강의 침략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침략 양상은, 갑신정변 후 청⋅일의 침략적 경쟁에서 더욱 확대되어 러시아와 영국이 가담하는 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의 활발한 진출은 그들의 전통적인 남하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청⋅일의 세력이 다 같이 위협을 받았다.
1860년 뻬이징 조약에 의거하여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는, 우리 나라와 접경한 후, 블라디보스톡에 군항을 개설하고 남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특히, 베베르 공사는 외교 수완이 능란하여 조선의 궁중과 정부에 친러 세력을 부식하고,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는 조⋅러 밀약을 꾸미려 하였다. 또한, 육로 통상 조약을 맺어 경흥을 그들의 무역지로 개방하게 하고, 두만강의 운항권도 차지하였다. 그리고,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부동항을 획득하려고 원산과 절영도에 저탄소를 설치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일들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그만한 세력을 뻗칠 수 있었던 것은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대하여 조선 정계에서도 반청, 친러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즉, 청이 보낸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와 그 뒤에 온 데니까지도 청⋅일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러시아의 진출을 방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청은, 대원군을 귀국시켜 방러책을 세우려 하는가 하면, 고종을 폐위하려는 모의까지 하였다.
한편, 영국은 러시아의 진출에 대항하고자 그들의 동양 함대를 보내어 거문도를 점령하고, 포대를 쌓아 군항을 만들어 해밀턴 항(Port Hamilton)이라 불렀다. 이것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조선의 영토를 그들의 이익을 위하여 불법 점유하는 제국주의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뒤 영국 함대는,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러시아의 다짐을 받은 다음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청, 러시아, 영국이 정략적인 각축을 벌이는 동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이 약해진 일본은, 대신 경제적인 침략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그들의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조선을 상품 시장 및 원료 공급지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일본이 가져오는 물품은 주로 일본에서 생산된 일용품과 상하이 등지에서 구입하여 오는 양품이었고, 조선에서 가져가는 것은 쌀, 콩 등의 곡물과 금, 은, 우피, 인삼 등의 원료품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조선의 전 수입액의 50% 이상, 수출액의 90% 이상을 차지하면서 무역 활동의 독점적 위치를 굳혀 갔다.
이와 같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것은 농민이었다. 농민은 값비싼 생활 필수품을 사기 위하여 미곡을 싼 값으로 팔아야만하였다. 부산과 원산에는 일인들의 큰 곡물 거래소가 생겼는데, 그들은 농민들의 곤궁을 틈타 입도 선매 또는 고리대 형식의 곡물 수매를 하여 이중으로 이익을 보았고, 그에 따라 조선의 농촌 경제는 갈수록 피폐해졌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막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서 취해진 것이 방곡령이었다. 그러나, 함경도에서 시행한 방곡령은, 절차상의 문제를 꼬투리로 일본이 항의했기 때문에 실시하지 못하고 말았다.
동학 농민 혁명 운동
고부 민란에서 발전한 동학 농민 혁명 운동은 우리 나라 역사상 최대의 농민 혁명의 추진이었고, 농민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안으로는 붕괴되고 있는 유교적 전통 사회를 부정하여 자율적 개혁을 도모하였고, 밖으로는 외국의 침략을 몰아 내려는 민족 운동의 양상을 나타냈다.
최제우가 사형을 당하면서 탄압을 받아 오던 동학은, 가난한 농민과 정계에서 몰려난 잔반(殘班)이란 양반 후예 사이에 그 세력을 뻗쳐서 삼남 지방에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교세가 커지자, 동학의 탄압을 막고자 전라도 삼례와 서울에서 집단적인 시위 운동을 벌여 교조 신원 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에 실패하자, 그들은 충청도 보은에 모여, 집단적인 정치 운동인 탐관 오리의 숙청과 양왜(洋倭) 배척을 주장하였다. 정부의 위압으로 해산되기는 하였으나, 이미 그 위세는 삼남 일대의 민중을 동요시킬 만하였다.
조병갑의 토색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고부 민란(1894)은, 처음에는 철종 때부터 자주 발생하던 지방 민란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의 진압과 사후 대책이 졸렬하였다. 이에, 동학 접주 전봉준을 대장으로 하는 수만의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게 되어 고부, 태인, 부안, 정읍, 흥덕 등을 휩쓸었다.
이 사태는 민란과는 그 성질이 달랐다. 그들은 제폭 구민(除暴救民)과 보국 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었을 뿐 아니라, 척왜 양이를 주장하고, 드디어 혁명적인 저항의 불을 지르기에 이르렀다. 탐관 오리와 일본 상인의 위협을 심히 받아 오던 농민이 주동이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동학교도가 많았다.
이와 같은 농민의 저항 의식과 동학의 교단 조직은 빈약한 무기로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북진을 계속하여 한때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정부가 끌어들인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고, 이어 일본군이 출동하여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동학 농민군은 정부와 폐정 개혁에 타협을 하고 일단 해산하여 하회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난후의 지방 치안과 재정을 맡아 보기까지 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그 해 9월에 들어, 일본군이 궁궐에 침입하고, 민씨 정권을 몰아 내며 친일 정부를 세울 뿐만 아니라, 청⋅일 전쟁을 도발함을 보고, 다시 일어나 구국 항쟁을 벌였다. 이 때는 동학의 남북접이 합세하여 북쪽으로 진군, 공주 공격전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혈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우월한 무기를 갖추고 정규군의 작전을 벌이는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을 치르고 퇴각하였는데,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간부들은 체포, 처형되었다.
그 후, 일본군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동학 농민군을 수색하여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그런 중에도 동학 농민군의 항일 구국 투쟁은 삼남 일대에서 경기, 황해, 강원, 평안도에까지 번져 가 끈질긴 항쟁을 벌였으나, 마침내는 모두 진압되어 동학 농민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동학 농민군의 혁명은 이와 같이 실패하였으나, 그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밖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침입할 구실을 삼아 대군을 파견하여 마침내 청⋅일 전쟁을 일으켰고, 안으로는 갑오경장이 추진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성리학적 전통 사회가 붕괴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근대 사회로 전진하는 중요한 계기를 이룬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