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근대 사회1. 민족적 각성과 근대 문화의 수용

(4) 근대 문물의 수용

제도의 개편

동학 농민군의 진압에 성공한 일본은 청⋅일 전쟁을 서두르면서 조선 정부에 대하여 내정 개혁을 강요하였다. 그 목적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침략 정책 추진상 책임의 소재를 밝힐 수 있는 정돈된 정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왕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비 세력을 몰아 낸 후 김홍집 등의 개화파로 친일 정부를 조직하여, 그들의 개혁안대로 국정 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여기에 갑신정변의 관련 인물들인 유길준, 박영효, 서광범 등의 개화파가 가담하게 되었다.

정부의 입장은, 이런 기회나마 그 동안 현안이었던 부국 강병을 위한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의도는 조선의 정부와 사회를 일본과 비슷한 근대 자본주의적 체제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들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갑오경장은 조선에서 절실했던 군대의 양성이나 군제의 개편 같은 것에는 손도 대지 못하는 타율적인 면이 나타났다.1) 따라서, 갑오경장은 근대적 개혁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지지를 얻지 뭇하고 도리어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갑오경장은, 정치적 면에서는 청과의 종주 관계를 끊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왕실과 정부를 분리하여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누고, 의정부 밑에 8아문을 두어 국정을 분담시켰다.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관리 등용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사법권을 행정에서 분리시켜 국민의 체포와 구금, 재판은 경찰관과 사법관만이 하도록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재정의 일원화가 행해졌다. 갑신정변 때의 재정을 호조에서 총괄하게 하던 예에 따라 세입, 세출, 조세, 국채, 화폐, 은행 등 일체의 재정에 관한 사무를 탁지부에서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은본위제의 화폐 제도 채택과 조세의 금납제를 시행하고, 도량형을 개정, 통일하였다.

갑오경장의 또 하나의 중요한 면은, 반상(班常)의 신분 제도를 폐지하는 사회적인 제도의 개혁이었다. 양반과 평민의 법률상의 평등뿐만 아니라, 천민 신분의 폐지, 인신 매매의 금지 등 양반 사회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일련의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 밖에도 조혼의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등의 폐지, 양자 제도의 개정, 의복 제도의 간소화 등 봉건적 유습의 타파가 기도되었다.

갑오경장은 추진상으로는 일본의 강압적인 요구로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내용도 왜곡된 면이 많았다. 그러나, 역사의 큰 흐름에서 보면, 개항 이후 동학 농민 혁명 운동에 이르는 동안에 이룩하려던 개화 운동의 연장으로서, 홍범 14조(洪範十四條)는 이와 같은 개혁 정치의 요강이며,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 문물의 수용

개항 이후 근대 과학 문물과 기술이 도입되어 통신, 교통, 전기, 의료, 건축, 산업 등 각 분야에 새로운 시설이 생기고 생활 양식의 변모를 가져왔다. 더우기, 독립 협회의 활동을 전후해서 일반의 근대 문명에 대한 각성이 높아져 그 같은 시설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시설은 대부분 우리 손으로 이루지 못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을 추진하던 외국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면보다는 그들의 침략 도구로 이용되는 면이 많았다.

일본에 간 신사 유람단과 청에 간 병기 습득 유학생들이 돌아온 후, 정부는 기기창, 박문국, 전환국 등의 근대 시설을 갖추어, 여기에서 신문을 발간하고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던 우정국이 다시 운영되었고(1895), 만국 우편 연맹에 가입하여 외국과도 우편물을 교환하였다.

통신 시설은 청에 의하여 서울-인천 간과 서울-의주 간에 전신선이 가설되었는데, 이것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전후하여 청과의 연락을 신속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데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뒤, 정부에서 일본과 합작하여 서울-부산 선을 가설하고 전보 총국을 설치하였으며, 통신원을 두어 통신 사무를 자주적으로 관리하였다. 처음에는 전화가 궁중 안에만 가설되었는데, 서울-인천 간의 시외선도 가설되고, 뒤이어 서울 시내 일반에도 가설되었다.

한말의 남자 교환수   
1893년에 전화가 가설되면서 궁내부에 설치된 교환대와 교환수의 모습이다.

철도는 서울-인천 간의 경인선이 최초로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부설권을 얻은 미국인 모오스가 착공하였으나, 일본에 전매되어 완공되었다. 그 뒤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은 군사적 목적으로 우리 나라를 남북으로 연결하여 대륙과의 교통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우선 경부선과 경의선을 부설하였다.

한편, 황실과 미국인 콜브란의 합자로 설립된 한성 전기 회사에 의하여 전차가 부설되어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이어, 한성 전기 회사는 서울에 최초로 전등을 가설하였다.

근대 의료 시설과 기술로는 정부의 지원으로 미국인 선교사 알렌이 광혜원을 설치한 것이 처음이었고, 지석영이 종두법을 보급시켜 국민 보건에 공헌한 것을 들 수 있다. 그 뒤, 정부에서 광제원을 설립하여 신식 의료를 시작하였고, 대한 의원을 세웠다. 그리고, 진주, 청주, 함흥 등 전국 10여 곳에 자혜 의원을 세워 의료 시설을 확장하였다. 대한 의원에서는 의학부, 약학부, 산파과, 간호과 등을 부설하여 의료 요원도 양성하였다, 세브란스 병원도 세워져 의료 보급에 노력하였다.

건축 부문에서도 서구 양식의 건물이 세워졌는데, 독립문은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뜬 것이고, 10년 만에 완공된 덕수궁 석조전은 르네상스식의 건물이다. 이 밖에, 중세 고딕식인 명동 성당도 이 무렵에 세워졌다.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 내에 있는,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1) 갑오경장은 추진상에 있어서나 내용면에 있어서 일제가 왜곡시켜 비자주적인 면이 많았다. 개화란, 자주적인 입장일 때에는 근대화의 추진이 되나, 타율적인 입장일 때에는 제국주의 침략의 방편이 되는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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