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근대 사회1. 민족적 각성과 근대 문화의 수용

(5) 독립 협회와 대한 제국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일본은 청⋅일 전쟁에 승리한 다음,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서의 청의 세력을 일소하였다. 그리고, 청으로부터 요동 반도와 타이완을 할양받고 배상금 2억 냥을 차지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륙으로 진출하여, 열강의 아시아 정책에도 변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남하 정책의 일환으로 만주 경영을 추진하던 러시아는 곧 독일, 프랑스와 협동하여, 일본에게 동양 평화에 해롭다는 구실로 요동 반도를 청에게 반환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3국 간섭(三國干涉)에 맞설 힘이 없는 일본은 부득이 요동반도를 청에게 반환하여 국제적 위신이 추락되었다.

일본의 내정 간섭을 꺼리던 조선 정부는 이 기회에 배일 친러 정책을 썼다. 따라서, 갑오경장을 추진하던 박영효 등은 정권에서 물러나고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등의 친러 내각이 조직되었다. 이에, 일본은 이와 같은 정치적 퇴색을 만회하려고, 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 낭인과 군대로 하여금 우리 나라 궁궐을 침입시켜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친러파를 축출한 후, 김홍집, 유길준, 서광범 등의 친일 내각을 조직하였다. 이 사건은 국민의 민족 감정을 크게 자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열강의 여론까지 들끓게 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수립된 친일 정부는 갑오경장 후 중단되었던 개혁을 급진적으로 강행하였다. 양력의 사용을 비롯하여, 종두법 실시, 우편 제도의 개시, 군제의 개혁 등을 단행하고, 마침내 단발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친일파에 의한 급진적 개혁은 국민의 배일 의식만 고취시켰고, 그 결과는 을미사변의 발발과 함께 마침내 항일 의병이 일어나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개항 때부터 척사론을 주장하여 배일 운동을 주동하여 왔던 지방의 양반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세력을 몰아 내고 국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소응, 이춘영을 중심으로 강원, 경기에서 발생한 의병은 곧 삼남 일대로 번져 반일 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 수천 명을 헤아리는 유인석의 의병 부대는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삼국 간섭으로 기세를 올린 러시아는 을미사변으로 실각한 친러파와 짜고, 을미사변의 뒤처리와 의병의 봉기로 국내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러시아 수병을 데려다 공사관을 호위하고, 고종을 궁궐에서 몰래 빼내는 아관 파천(俄館播遷)을 도와 정국을 다시 뒤집어 놓았다. 그리하여, 윤용선을 총리로 하는 이완용, 이범진 등의 친러 내각을 성립시켰다.

이로부터 러시아의 세력은 급격히 커지고 많은 잇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러시아는 조선 군대의 훈련과 재정의 감독권을 차지하고 경원, 종성의 광산 채굴권과, 압록강 유역 및 울릉도의 삼림 채벌권도 빼앗아 갔다. 그리하여, 탁지부의 러시아인 고문 알렉세예프는 마치 재무 장관 같은 행세를 하고, 서울에 한⋅러 은행을 설립하여 금융권마저 차지하려 하였다.

한편, 다른 나라들도 이에 따라 모두 이익의 호혜 평등을 요구하고 나와, 광산, 철도, 산림, 어장 등 각종 잇권은 이들 열강들에게 차례로 분배되다시피 하였다.

독립 협회의 활동

을미사변과 아관 파천 이후 조선은 외국의 잇권 쟁탈의 싸움터가 되었고, 정치는 일본이나 러시아 세력에 의해 좌우되다시피 되었다. 그런데, 정쟁에 여념이 없는 부패한 정계에서는, 민족과 국가의 이익보다는 자기 일신과 자기 파의 이익만 추구하는, 외세 의존적인 이기주의가 팽만하였다.

나라의 형편이 이와 같이 되자, 정계 일부와 국민 사이에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부국 강병을 기약하는 자주 독립, 민권 신장, 자강 혁신 운동을 일으켜 민족적 각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독립 협회(獨立協會)의 활동으로서, 그 조직은 서재필, 이상재, 남궁억 등 서구의 근대 사상과 개혁 사상을 지닌 인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1)

이들은 독립문, 독립관 등을 세우고 독립 신문을 간행하여, 민족의 자주 의식을 높이고 개화 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의 민족적 과업이나 사회적 요청에 일치되었으므로, 독립 협회는 곧 정치적 사회 단체로 성장하였다. 또한, 민중의 자발적 참여가 높아서,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지방 중요 도시에도 지회가 설치되었다.

서재필과 독립 신문   
1896년, 서재필이 주관하여 창간한 독립 협회의 독립 신문의 한글 및 영문판이다.

그리하여, 독립 협회는 계몽 활동을 통하여 민중 속에 뿌리박고 자주 호국 선언2)을 하여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펴 나갔다. 그리고, 종로 광장에서 최초의 민중 대회라고 할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정부의 외세 의존적인 정치⋅군사⋅경제 정책을 규탄하고, 헌의 6조(獻議六條)를 결의하여 국정의 자주 노선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입헌 의회 민주주의를 주장하여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근대 의회 민주주의 사상을 제창하였다.

독립 협회 헌의 6조

1. 외국인에게 아부하지 말 것.

2. 외국과의 잇권 계약과 조약은 대신이 단독으로 처리하지 말 것.

3. 국가 재정의 수지를 공정히 하고, 예산을 국민에게 공표할 것.

4. 중대 범죄의 공판, 언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좇을 것.

6. 별항의 규칙을 실시할 것(외국의 하원을 모방한 민회 설치 등).

정부는 한때, 이와 같은 독립 협회를 통한 민중의 구국 자강책을 받아들여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독립 협회는 보수적 집권층과 일제의 견제에 의하여 정부의 탄압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반동적인 황국 협회(皇國協會)를 만들어 독립 협회의 본부와 만민 공동회를 습격하여 유혈 사태까지 일으켰다. 또한, 그들은 독립 협회가 전제 군주제를 폐하고 입헌 공화제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해산령을 내리게 하고, 독립 협회의 간부를 투옥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독립 협회가 주장한 자주, 민권, 자강 사상은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 의식을 형성하게 되어, 그 후 일제 침략기에 있어서 민족 운동을 펼쳐 갈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

대한 제국의 성립

1807년에 고종은 내외의 여론을 좇아 마침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황제를 칭하여 자주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안으로 그 동안 국민의 자주 민권 운동이 전개되어 환궁의 여론이 높았고, 밖으로 러시아의 독점 세력을 막으려는 일⋅미⋅영 등의 국제적인 여론도 있어서 대한 제국이 형성되기는 하였으나, 끝내는 자체 내의 모순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하여 해체되어 가고 있던 조선 왕조의 마지막 형태를 보인 데 불과하였다.

대한 제국은 처음 근대 국가로의 발전을 기약하여 관제를 개혁하고, 사회 경제적인 자강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신교육령에 의하여 소학교, 중학교, 사범 학교 등을 설립하고, 독립 협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추원을 구성해서 민의가 반영되는 개혁 정치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한 제국은 열강의 간섭을 불식하지 못하였고, 정권 내부의 보수적 파쟁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일본을 꺼리어 경복궁 아닌 경운궁에 있으면서, 러시아를 비롯한 미⋅영⋅프 등 경운궁을 에워싼 외국 영사관에 의지하려는 태도도 보였다. 그러므로, 잇권은 계속하여 열강들에게 빼앗기고 있으면서도, 보수적 집권층은 제각기 외세 의존적인 태도를 취하여, 국민의 자주 독립을 위 한 민권 운동을 탄압하면서 정권을 연장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결국 나라가 일본과 러시아의 식민지 흥정과 전쟁 대상물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러⋅일 전쟁으로까지 진전하게 되었다.

1) 독립 협회의 사상적 흐름에는 두 갈래가 있었다. 서재필, 윤치호 등의 서구 시민 사상의 도입 수용이 그 한 조류이고, 남궁억, 정교 등의 개신 유학적 전통을 바탕으로 한 국내 개혁 사상이 또 하나의 조류라 할 수 있다 이상재 등은 이 두 조류를 합류시켜 독립 협회의 현실적 자주, 자강과 개화 혁신 운동에 기여하였다.
2) 독립 협회 회원 135명이 모여 결사적인 구국 운동을 서약하고, “밖으로 자립하여 국권의 상실을 막고, 안으로 자주하여 전장 법도를 준행하며, 관민의 협력으로 국권의 자주를 기하자.”는 구국 선언을 상소 형식으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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