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고대 사회의 발전4. 고대 문화의 발달

(2) 사상의 발달

원시 종교

삼국 시대에 들어와서도 민간에서는 천신, 일월신, 산신, 해신 등의 여러 신을 모시는 샤머니즘과 점술이 널리 퍼져 있었다. 왕실이나 지배 부족들은 조상의 영혼이 자신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왕이나 족장은 시조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면서 그 후계자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사회는 이미 초부족적인 상태로 변하였으므로, 샤머니즘 등의 원시 종교를 가지고서는 확대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부족과 부족을 통합할 수 있는 이념을 가진 새로운 종교인 불교가 이를 대신하여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불교의 수용

불교는 삼국이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체제가 정비될 무렵에 전래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때에, 백제에서는 침류왕 때에 공인되었다. 그리고 신라에는 5세기 중엽에 전래되었으나, 법흥왕 때에 이르러 이차돈이 순교한 뒤부터 공인되었다.

삼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왕실이었다. 따라서, 불교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당시의 불교는 종교로서의 구실과 함께 서역과 중국의 문화를 우리 나라에 전달하여 고대 문화의 발달에 공헌하였다. 또, 인간 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해소하려 하였다. 아울러 하나의 불법에 귀의하는 같은 신도라는 신념은, 국왕을 받드는 같은 신민이라는 생각과 함께 중앙 집권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공(空)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는 삼론종이 크게 발달하였고, 백제에서는 계율을 내세우는 율종이 발달하였다. 백제의 겸익은 성왕 때 인도에서 율종 관계의 불경을 가지고 돌아와서 번역까지 하였다. 한편, 백제는 6세기 중엽에 일본에 불교를 전해 주었으며, 많은 승려를 보내어 일본 불교의 기초를 닦아 주었다.

삼국의 불교 전래도   

또, 신라에서는 여러 왕이 불교식 이름을 가지기도 하였다. 진흥왕 때에는 고구려의 승려 혜량을 맞아 국통으로 삼고, 그 아래에 주통, 군통 등의 승관을 두어, 전국의 불교 교단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 뒤, 진평왕 때 원광은 불교를 크게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세속 5계를 정하여 청년들에게 가르치는 등 새로운 사회 윤리와 국가 정신을 확립하기에 힘썼다.

한편, 도교도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 사회에 전래되어 있었으며, 재래의 민간 신앙과 결합되어 번성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보장왕 때 연개소문은 불교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도교를 장려하기도 하였으며, 보덕은 도교의 불로 장생 사상에 대항하기 위해 열반종을 개창하였다.

불교 사상의 발달

우리 나라에는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가 뒤섞여 들어왔지만, 대승 불교가 그 주류를 이루었고, 여러 종파로 나뉘어 사상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또, 삼국 시대의 불교는 토착 신앙을 포섭하면서 보급되었으므로, 뒷날까지 토착 신앙과 융합되어 샤머니즘적인 성격도 띠게 되었다.

신라인은 통일기에 들어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자기 종파적인 사상의 이해에 그쳤던 데에서 벗어나, 불교 사상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 체계를 세웠다. 아울러, 신라 사회에서는 대중 불교의 성격이 나타나면서 그 종교 기반이 확대되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와 같은 명저를 남겨 불교를 이해하는 기준을 확립하였으며, 화쟁(和諍) 사상을 주장하여 여러 종파를 융합하려 하였다.

한편, 원효와 같은 시대의 의상은 신라 화엄종을 창설하였는데, 그의 저술인 화엄일승법계도는 간략하면서도 화엄 사상의 요체를 제시해 주는 것으로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불교 사상을 발전시켰다. 특히, 하나 속에 우주의 만물을 아우르려는 의상의 화엄 사상은 전제 정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 원측은 당에 들어가 유식(唯識) 불교의 깊은 뜻을 깨달아, 당의 수도에 있는 서명사에서 자기 학설을 강의하였는데, 그는 현장의 사상을 계승한 규기와 논쟁하면서 교리 이해의 우월성을 보여 주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 불교는 철학 체계를 갖추면서 논리적으로 발달해 감과 동시에 대중 불교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불교를 대중화시키는 데에는 정토 신앙이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의 정토 신앙으로는 죽고 난 후 극락 세계에 왕생하기를 비는 것이 있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산 몸으로 극락 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도 있어 서민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

한편, 불교 연구를 위하여 인도에 가는 승려가 많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인 혜초는 당에서 바닷길로 인도에 들어가 각지를 두루 순례하고 돌아왔다. 이 때의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인도와 서역 지방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신라 중엽 이후, 귀족 문화의 발달이 절정에 달하면서 지배층의 생활은 사치스러워졌다. 이러한 경향은 말기로 내려오면서 점차 향락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이에, 퇴폐적인 것에 반발하는 은둔적인 사상 경향이 생겨, 도교와 노장 사상이 널리 퍼졌다.

선종의 등장

선종은 통일 전후에 전래되었으나, 교종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하다가 신라 말기에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도 화엄종의 대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선승들도 처음에는 대체로 화엄 사상을 습득하고 있었다.

선종은 교종의 기성 사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고, 개인적인 정신 세계를 찾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에 선종은 지방에서 독자의 세력을 구축하려는 호족의 취향에 어울렸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의 각 파들은 지방의 호족 세력과 관계를 가지면서 각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여러 종파를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 유력한 것이 9산이었다.

원래, 선종은 중국에서 새로운 문화 운동의 하나로 성립된 종파였던 까닭에, 신라인으로 하여금 그만큼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으며, 많은 도당 유학생들의 반신라적 움직임과 결부되어 고려 왕조의 개창에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대안사 적인선사 부도(전남 곡성)   

발해의 불교

발해에서도 불교가 융성하여, 수도였던 상경에서 10여 개의 절터가 발견되었으며, 또 불상, 석등, 연화무늬 와당 등 불교 관계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발해의 석등(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의 불교는 고구려의 불교를 계승하여 왕실이나 귀족 중심으로 신봉되었다. 발해의 명승인 정소는 불법을 널리 선양하였고, 당과 일본에도 왕래하여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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