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고대 사회의 발전4. 고대 문화의 발달

(3) 학문과 기술의 발달

삼국의 학문과 기술

삼국 시대에는 우수한 문화를 배경으로 한 중국의 한자와 그 문학이 들어와 있었으므로 대부분이 한자를 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삼국 시대의 지명 등을 보면, 한자의 뜻과 음을 따서 만든 이두로써 우리말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의 기록은 삼국 시대에 널리 행해졌으며,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하고, 태학을 세워 한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지식층에서는 경서와 역사서가 읽혀졌다. 또, 각처에 경당을 세워 청소년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특히, 광개토 대왕릉 비문과 중원 고구려 비문은 고구려의 문화 수준을 엿보게 한다.

백제에서도 일찍부터 한학이 발달하여 5경 박사와 의박사, 역박사가 있었으며, 한학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백제가 북위에 보낸 국서는 매우 세련된 문장으로서 당시의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보고 있으며, 아울러 사택지적 비문에는 노장 사상이 나타나 있다.

사택지적 비문(탑본)   

신라에서도 한학이 널리 연구되었다. 임신 서기석에는 신라의 청년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의 정치⋅사회적 발전과 한학의 발달은 역사서의 편찬 사업을 일으키게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역사서가 편찬되어 유기가 있었는데, 이것을 이문진이 간추려 신집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백제에서는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의 편찬이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신라의 진흥왕 때와 같이 국력이 크게 번성하던 때에 있었던 것이 주목된다.

한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역법, 의학 등 과학 부문의 연구도 활발하였고, 공예, 건축 등 기술 부문에서도 상당한 발달을 보였다.

또, 삼국은 모두 농업에 기본을 두고 있어서,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천문학이 발달하였다.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천문대이며, 물리학적 지식까지 응용하여 축조되었다. 또, 사원의 경우, 법당과 탑을 적절히 배치하는 등 건축에는 기하학의 원리를 도입하였으며, 역법에는 수학을 응용하였다.

한편, 금, 은, 구리의 세공 및 도금 기술은 신라의 금관이나 백제의 칠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유리로 된 구슬과 그릇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유리를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다.

유리병(경주 황남 대총)   

통일 신라의 학술

한학에 있어서는, 통일 초의 문장가로 강수를 들 수 있다. 그 뒤의 설총은 경서에 조예가 깊었고,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학 학습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6두품 귀족 출신으로서 유교를 신봉하였으며, 도덕적 합리주의를 내세웠다. 특히, 설총은 화왕계를 지어 임금도 도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국학을 설립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학을 가르쳤다. 신라 하대에 들어와서, 학문 성적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자는 새로운 원칙을 세워, 원성왕 때에 성적에 따라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 삼품과를 마련하였다(788). 이 제도는 골품 제도로 말미암아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하였으나, 학문을 보다 널리 보급시키는 데에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한편, 성덕왕 때에 진골 귀족 출신인 김대문은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등을 저술하였으며, 신라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당에서 공부한 유학생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김운경, 최치원 등이었다. 그들은 골품 제도에서 오는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최치원은 진성 여왕 때 문란해진 정치를 바로잡고자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자 정치에 뜻을 잃고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그러한 생활 속에서도 훌륭한 저술과 뛰어난 문장을 남겼다. 그가 지은 계원필경과 비문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한편, 천문학, 역법, 의학, 병학 등의 기술학도 발달하였는데, 병학과 천문학에서는 김암이 조예가 깊었으며, 삼국 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된 의학이 전통 의술과 어울어져 더욱 발달하였다. 또, 수학도 크게 발달하여 각 방면에 응용되고 있었다. 석굴암의 평면 구성이나 천장의 돔(dome), 불국사 3층 석탑 등 여러 건축물의 균형잡힌 비례 구성에는 모두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다.

또, 목판 인쇄술도 크게 발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이것은 8세기 중엽의 인쇄물로 현존하는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한편, 신라 말기의 승려 도선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 지리설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경험에 의한 인문 지리적 지식을 활용하려는 학설인데, 뒤에 예언적인 도참 신앙과 결부되었다. 그리하여 지방의 어느 지역을 도읍이 될 만한 곳이라고 하는가 하면, 각 지방에 있어서도 그 지세에 따라 좋고 나쁜 곳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또, 풍수 지리설은 그 때까지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운영해 오던 행정 조직을 고쳐, 국토를 지방 중심으로 재편성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까지 발전하여, 신라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발해의 학문

발해 역시 당과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당으로부터 많은 서적을 수입하고, 당에 유학생도 보내어 일찍부터 학문이 발달하였다. 또, 발해는 주자감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들에게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유학생 중에는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왔고, 이거정 등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유교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발해에서는 대외적인 외교 문서는 물론 국내외에서의 공식 기록에 한문을 사용하였다. 또, 묘지나 외교 문서 등을 통하여 한문학의 수준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외교 사신이나 승려 중에는 한시에 능한 사람도 많았다.

근래에 발견된 정혜 공주 묘지와 정효 공주 묘지1)가 세련된 4⋅6 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발해에서는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한시가 현재 전하는데, 양태사나 왕효렴의 작품이 유명하다.

정효 공주 묘지(중국 길림성)   
1)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는 문왕의 둘째 딸과 넷째 딸이며, 그 각각의 묘지가 1949년과 1980년에 만주에서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발해 문화의 연구에 소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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