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고대 사회의 발전4. 고대 문화의 발달

(4) 예술의 발달

고구려 미술

고대 사회의 미술 활동은 주로 고분과 불교 미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삼국은 각기 많은 고분을 남겼다.

고구려의 고분에는 돌무지무덤과 굴식 돌방무덤이 있는데, 굴식 돌방무덤 내부에는 벽화가 있기도 하여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돌무지무덤이 만들어졌으나, 점차 굴식 돌방무덤이 주류를 이루었다. 돌무지무덤으로는 장군총이 유명한데, 계단식으로 화강암을 7층으로 쌓아올렸다. 맨 아래층의 길이는 약 30m이고, 높이는 약 13m이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서 각 층의 길이와 높이를 줄여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굴식 돌방무덤은 흙으로 덮은 봉토 내부에 굴식 돌방이 있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은 만주 집안의 무용총과 강서 고분 등이다. 강서 고분의 돌방에 그려진 사신도는 고구려의 벽화 중에서도 매우 우수한 것으로, 흑, 백, 청, 주홍, 갈색 등의 색깔이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열과 세련미가 넘쳐 흐르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도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사신도 외에, 당시의 생활 풍속이나 가옥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있고, 수렵이나 행렬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있다. 이러한 벽화들 중에는 서역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

씨름도(각저총)   

한편, 불상은 중국 북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다른 미술품에서와 같이 고구려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은 두꺼운 법의를 입어 몸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신비하면서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다. 또, 광개토 대왕릉비는 선돌 형태의 자연석에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록하였는데, 그 글씨체가 기운차고 독특하다.

백제 미술

백제의 유물, 유적은 많이 파괴되었으나, 금동불, 석불, 석탑 등 불교 관계의 유물을 비롯하여, 고분 안에 그린 벽화와 기와, 무늬 벽돌 등이 출토되고 있다.

서울 석촌동에 있는 한성 시기의 고분은 고구려 초기의 고분과 유사한 돌무지무덤이다. 웅진 시기의 공주 고분에는 굴식 돌방무덤과 무령왕릉 같은 벽돌 무덤이 있는데, 이 벽돌 무덤의 건축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웅진 시기의 고분은 아직 소박하고 고졸한 맛이 남아 있으나, 사비 시기에 와서는 귀족 미술이 크게 발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능산리의 굴식 돌방무덤을 보면, 건축 기술과 벽화가 매우 세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고분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나, 보다 완만하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또,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이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금관의 장식 등 우수한 백제 공예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 용봉 봉래산 향로는 도교와 불교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 매우 훌륭한 공예품이다.

한편, 석불 중 서산 마애 삼존불상은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석탑으로는 목조탑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초기 형식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있고, 균형이 잡힌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이 유명하다.

미륵사지 석탑(전북 익산)   
정림사지 5층 석탑(충남 부여)   

신라 미술

신라의 미술은,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나, 뒤에는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구려, 백제 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패기가 넘치고 조화된 아름다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수한 건축물로는 웅대한 분황사 모전 석탑과 아름다운 곡선미를 지닌 첨성대가 남아 있고, 백제의 아비지가 건축한 황룡사 9층탑 등이 있었으나, 몽고 침입 때 소실되었다.

황룡사 복원 모형도   

통일 전의 신라 고분 양식으로는 돌무지 덧널무덤, 돌방무덤 등이 있는데, 규모가 큰 것은 대개 돌무지 덧널무덤이다. 또, 신라의 불상으로 탑의 모습이 새겨진 관을 쓴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에는 정신적인 힘이 나타나 있다.

신라에는 솔거와 같은 뛰어난 화가가 많았지만, 작품은 전하지 않고, 무덤의 구조상 벽화는 남기기가 어려웠다. 다만, 경주 황남동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는 패기찬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금팔찌, 금귀걸이 등의 출토품들도 매우 세련된 솜씨를 보여 주고 있어, 신라 미술의 높은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천마총 단면도   

통일 신라의 미술

통일 신라 시대의 미술은 무르익은 기교의 산물이었다. 특히, 이 시대의 미술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면서도 실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 미의 세계와 통일된 조화의 세계를 창조하려 하였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는 궁성 안의 인공 연못인 안압지는 못의 둑 전체를 돌로 견고하게 쌓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나온 많은 유물을 통해서 화려했던 당시의 궁중 생활과 귀족 생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호수 안의 굴곡이나 섬의 위치, 정자와 누각의 배치 등은 정원 조경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고 있다.

통일 신라의 대표적인 예술 작품은 석굴암과 불국사이다.

석굴암은 그 안에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 나한상, 인왕상 등을 배치하여 불교 세계의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 치밀한 구성을 밑받침으로 한 정제미는 당시 신라의 건축 기술이나 조각 또는 과학 기술의 높은 수준을 나타내 주고 있다.

석굴암 배치도   

불국사는 토함산을 배경으로 넓게 트인 앞을 내다보고 세워졌는데, 목조 건물은 임진왜란 때에 불타 버렸으나, 석조물과 기단은 지금까지 남아 있어 신라 불교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앞쪽에 있는 청운교, 백운교 등의 돌층계와 범영루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3층 석탑과 다보탑은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불국사(경북 경주)   

범종의 주조 기술도 뛰어났는데, 상원사 동종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성덕 대왕 신종은 크고 웅장하면서도 조각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소리의 아름다움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고 태종 무열왕릉비의 이수와 귀부의 조각, 성덕 대왕릉 둘레돌의 조각은 사실적인 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불국사의 석등,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도 박력이 있고 균형이 잘 잡힌 조각으로 이름이 높다.

한편, 통일기에 와서는 높은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웠는데, 대담하게 각 층의 폭과 높이를 줄이면서 쌓아올려 독특한 입체미를 나타내는 양식이 유행하였다. 감은사지 3층 석탑, 불국사 3층 석탑,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 등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걸작이다. 그리고 신라 하대에는 선종이 유행하면서 조각 솜씨가 뛰어난 부도가 많이 만들어졌다.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전남 구례)   

통일기에 와서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 방법이 유행하였고, 고분 양식도 돌무지 덧널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무덤의 봉토 주위를 둘레돌로 두르고, 그 둘레돌에 12지 신상을 조각하는 새로운 양식이 나타났는데, 이는 우리 나라만의 독특한 묘제이다. 이러한 통일 신라 시대의 묘제는 뒤에 고려, 조선 시대의 왕릉에까지 계승되었다.

한편, 서예에서는 김인문, 김생 등이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김생이 유명한데, 고려 시대에 그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집자 비문(集字碑文)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김생의 글씨   

또, 그림에서는 화가 김충의가 당에 가서 이름을 날렸다. 하대에 와서는 불화뿐 아니라 귀족이나 승려들의 초상화도 그려졌다.

발해의 미술

발해 시대의 지상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유적의 발굴로 그 웅장함을 알 수 있다. 상경은 당의 장안성처럼 먼저 외성을 두르고, 국왕이 있는 궁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직선으로 뻗은 주작 대로라는 큰 길을 내었으며, 그 좌우에 여러 갈래의 길을 내었다. 그리고 내성 안에는 여러 개의 궁전이 있었다.

또, 상경 등에서 발견되는 절터의 금당은 내부에 불단이 높게 마련되었고, 좌우에 회랑으로 연결된 두 건물을 두었다. 웅대한 금당을 중심으로 작은 건물이 대칭으로 연결된 구조는 사찰 전체를 웅장하게 할 뿐 아니라, 조화가 잘 이루어지게 하였다.

한편, 발해의 도읍이었던 곳을 중심으로 많은 고분이 남아 있다. 육정산 고분군은 정혜 공주 묘가 있는 곳으로, 용두산 고분군은 정효 공주 묘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 묘는 남쪽에 입구를 가진 굴식 돌방무덤인데, 벽은 다듬은 돌로 쌓아올리고, 천장은 모줄임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고구려의 고분 양식과 흡사하다.

발해의 조각도 그 솜씨가 뛰어났는데, 불상은 전불이나 철불, 금동불이 있으며, 얼굴이나 광배, 의상 등에 이르기까지 그 조각 수법이 웅장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또, 정혜 공주 무덤에서 나온 두 개의 돌사자 조각도 매우 생동감 있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발해에서는 금, 은으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릇이나 사리함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발해의 돌사자상   

궁궐 터나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 벽돌 등의 무늬는 소박하고 직선적이다. 특히, 기와는 일반적으로 그 형태와 크기가 아주 다양하며, 질이 좋고 단단하여 실용적이었다. 또, 연화무늬의 기와는 강건한 기풍을 지닌 고구려 와당에서 영향을 받았다.

발해의 무늬 벽돌   

한편, 상경에는 발해의 석조 미술을 대표하는 석등이 남아 있는데, 팔각의 기단 위에 중간이 볼록한 간석이 있고, 간석의 아래와 위에는 탐스러운 연꽃이 조각되어 있어서 질박하고 힘찬 느낌을 준다.

발해의 유적지   

또, 발해의 자기는 무게가 가볍고 광택이 있는데, 그 종류나 크기, 형태, 색깔 등이 매우 다양하다. 특히, 발해의 자기는 같은 시대 여러 나라의 도자기 공예보다 독특하게 발전하였으며, 당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발해의 도자기를 아주 신비로운 물건으로 생각하였으며, 그 제조 기술에 경탄하였다.

이렇듯 발해의 미술은, 패기에 넘치던 고구려 미술이 계승되어,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면서도 웅장하고 건실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향가와 음악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우리 민족은 노래를 즐겨 부르고 춤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예술적 재질은 중국 음악과 불교 음악의 영향을 받아, 삼국 시대에 와서 더욱 발달하였다. 삼국 시대의 노래로는 고구려의 황조가, 백제의 정읍사, 신라의 향가인 혜성가, 서동요 등이 전해지고 있다.

악기로는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등이 있었다. 고구려의 왕산악은 진의 7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많은 노래를 새로 지었다.

대가야에는 가야금과 그 악곡이 있었는데, 우륵은 이를 신라에 전하였다. 신라에는 대⋅중⋅소피리의 3죽과 거문고, 가야금, 비파의 3현이 있었다. 백제의 음악은 고구려와 비슷하였으며, 일본에 전해져서 일본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통일기에 이르러 향가는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크게 발달하였는데, 승려나 화랑들 사이에서 많은 작품이 나왔다. 월명사와 충담사는 향가의 작가로 유명하였고, 진성 여왕 때 대구화상과 위홍은 역대의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이란 향가집을 편찬하였다.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14수와 고려 초에 균여가 지은 11수를 합하여 25수뿐이다. 그 내용은 국가의 평안을 빌거나 부처를 찬양하며, 때로는 죽은 사람을 사모하는 마음을 노래하여, 그 시대 사람들의 높은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한편, 발해에서도 음악과 무용이 발달하였다. 발해악은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일본은 악공을 발해에 파견하여 음악을 배워 갔다. 아울러, 발해의 악기는 뒷날 송나라의 악기 제작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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