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송유진·이몽학 등의 난
(1) 송유진의 난
임란중에 크고 작은 반란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했는데, 그 가운데 선조 27 년 宋儒眞의 난과, 동왕 29년에 일어난 李夢鶴이 난이 가장 두드러진다. 왜란 초기 산발적인 소요는 신분해방을 위해 일어났다고는 해도 불만을 느껴온 지배층에 대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비조직적인 행동이었다. 또 이러한 행위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적의 세력권 안에 있었던 사건이었고 직접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송유진·이몽학의 난은 그 규모나 조직 면에서 양상이 판이했다. 이 두 반란은 왜군이 화의를 조건으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해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충청도지역이 중심이었고, 반란주모자들 도 정면으로 현왕권을 타도하고 새 나라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런 점에서 임란초 감사나 수령들의 수탈이나 혹사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이나, 왜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바라만 보다가 흩어지는 帥臣들을 증오한 농민들의 이반과는 성격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송유진의 난은, 이 반란을 주도한 송유진이 당초 선조 27년 정월 보름에 일당을 이끌고 거사하기로 한 것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로 돌아갔지만, 충청도 일대를 주무대로 한 반란의 활동상은 본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다른 지역에 동조세력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반란이 발각되기 전에 송유진 일당의 布陣狀況을 보면 1진은 淸溪山에, 1진은 춘천에, 또 다른 1진은 전라도 안에 있다고 하였다.177) 이 말이 확실히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지방관들의 보고내용을 보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세력들이 서로 연계되기 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다 役을 피해 가며 곤궁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인데, 士族과 武人들도 그 가운데 왕왕 섞여 있어 엄연히 무리를 이루어 횡행하기를 꺼리지 않으니, 닥쳐올 근심이 충청도뿐이 아니다(≪宣祖實錄≫권 47, 선조 27년 정월 기축).
위의 충청도 調度御使 姜籤이 馳啓한 내용을 보면, 叛民들 중에는 사족과 무인들도 섞여 있었으며, 이들이 반란음모에 주도적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천안에서는 무기를 관리하는 관원이 송유진 일당에 사로잡히는 일이 발생했을 뿐 아니라 본 고을 사람 중에는 자진하여 적중에 투입하는 자도 있었다. 중앙정부는 天安軍器監官 宋望器 등이 반민에게 사로잡힌 사건을 중시하여 宣傳官을 급히 파견하는 등 암암리에 송망기의 거처를 탐지하는 한편, 병사 邊良俊과 순변사 李鎰 등에 명하여 비밀리에 탐문토록 하였다.178)
송유진은 충청도 천안·직산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울의 수비가 허술함을 알고 의병장을 사칭하여 반란세력을 규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지리산·속리산·청계산 등지에 은신하고 있는 일당의 수가 2천 명이 넘었다고 하며, 그들은 군량미와 무기를 수집하여 많은 양을 비축하였다. 먼저 각처의 반란세력과 약속하고 군사를 움직여 아산·평택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병기를 탈취하였고, 그 뒤 서울을 침입하기 위해 먼저 전주에 다음과 같은 密書를 보내서 나라의 전복을 꾀했음이 분명하다.
왕의 악정이 고쳐지지 않고, 朋黨은 해소되지 않으며, 부역은 번거롭고 과중해서 민생이 편치 못하여 牧野에서 武勇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비록 伯夷·叔齊에게는 부끄러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죄를 추궁하노니, 실로 湯王과 武王의 빛남이 있도다(趙慶男,≪亂中雜錄≫권 2, 갑오 정월).
중앙정부는 송유진이 전주에 밀서를 보낸 같은 날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조문을 中外에 선포하였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수령으로 하여금 사려가 깊고 담력이 있는 자를 가려 반란세력과 동모자로 가장하고 적 중에 출입하여 겉으로는 반란에 동조하는 척하고 동정을 상세히 살필 것.
1. 叛賊으로 하여금 서로 체포하여 참수케 하여 상을 주는 규정을 두고, 함께 반란을 획책했더라도 반적 두목의 목을 베어 바치는 자는 즉시 論賞할 것.
1. 반적을 체포하는 일은 道 안에 장수 한 사람을 고정 배치시켜 감사·병사와 함께 힘써 조치하고 계획된 다음 때를 타서 평정하며 朴晋에게 반적을 체포하고 토벌하는 일을 일임할 것.
1. 도내 각 진영의 의병장으로 쓸만한 사람과 용력이 뛰어난 자를 박진으로 하여금 불러모으게 하여 手下兵으로 삼고 군량이 없으면 尹斗壽가 모은 조세로 군자금을 삼아 군세를 떨치게 할 것.
1. 반적으로서 귀순하는 자는 죄를 면해줄 뿐 아니라 또한 職을 내려주어 스스로 살아갈 길을 열어줄 것.
1. 반적의 두목을 체포하여 참수하는 자 가운데 수령은 당상관에 승진시키며 직이 있는 사람은 超敍하고 직이 없는 사람은 6품을 제수할 것(≪宣祖實錄≫권 47, 선조 27년 정월 기축).
충청병사 邊良傑은 송유진 등이 叛徒를 규합하여 무기·군량을 갖추어 서울을 침입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군사를 인솔하여 온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주모자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송유진 일당의 거사가 사전이 실패한 것 은 진천무사 金應龍의 계책이 주효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카벌 되는 洪殼이 반란주모자의 심복이 되어 종사관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직산의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위협하는 한편, 모사와 탈퇴를 놓고 이해타산을 가리게 하고 설득시킨 다음에 반도의 실상을 파악하여 홍각으로 하여금 송유진을 불러들이게 했다. 정월 15일 송유진은 홍각의 거짓 초청에 응하여 從者 수십 명과 함께 왔는데 김응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力士 洪瑀 등과 함께 송유진 일당을 포박하는데 성공했다.179)
선조는 송유진 등의 체포설을 들었으나 안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송유진 이 스스로 判書라고 칭한 사실 때문에 그 위에 괴수가 있으리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리하여 송유진 일당을 체포했다고 해서 반란세력에 대한 방비가 해이해 지는 것을 경계하여 서울의 각 성문을 철저히 지키게 하는 한편 한강의 경비를 엄격히 하게 하고 남산 위에 장졸들로 대오를 짜서 주야로 망을 보게 하였다. 또 병조에 명하여 장사들 간에 部伍를 편성케 하여 대기시켰고, 趙儆을 砲手大將으로 삼고 별도로 禁軍大將을 두어 함께 입직시키게 하고 좌우명에 있는 화기·화약·궁시·검창 등을 모두 대궐 안 軍器寺로 들여놓고 방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또한 龍山倉에는 용맹한 군사를 배치하여 항시 계엄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영의정 유성룡과 병조판서 李德馨에게 대궐 안에서 잠을 자도록 하는 등 모든 일을 수시로 변통하여 대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송유진의 반란음모 이외에 그 이상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송유진 일당 체포로 그치었다.
체포된 송유진의 송치문제에 대해서는 중신들 간에 구구한 논쟁이 있었다. 현지에서 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로 압송하여 鞫問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논란 끝에 송유진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하고 선전관·금군·도사 등을 보내서 수로를 이용하여 10여 일만에 도착하였다. 대궐 뜰에서 推 鞫이 시작되었으며 대신과 양사의 장관만이 참석토록 하였는데 송유진 일당 과 무관한 사람들의 誣引을 막기 위하여 전일 송유진과 한패였으나 마음을 바꿔 송유진을 포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을 입회하도록 하였다. 정월 24일 추국이 시작되자 송유진 일당은 반역을 시인하고 정월 15일 반란을 일으켜서 서울을 침범하기로 결의하였다고 순순히 자백하였다. 결국 송유진은 나라가 위태하고 어려운 시기에 편승하여 不軌를 꾀하면서 印信과 帖文을 위조하여 인민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무기와 군량을 탈취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하고 여러 곳에 반군을 결성하여 서울을 범하려 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송유진의 가재·전답·잡물 등은 그를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洪應沂 등에게 분배되었다. 이 송유진의 난에 연관되어 승복한 뒤 처형된 사람은 송유진을 비롯하여 16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1명, 추국을 받다가 사망한 자가 1명으로 모두 18명이었으며 이 난에 연관되어 추국을 받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들 중에는 속아서 빠져든 의병장·현직관원·사족 등 광범한 인물들이 체포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李山謙·呂大老·盧一凱·趙瑗·申應熙·金達孝·趙希進 등이었다. 이산겸을 제외한 이들은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이산겸만은 반란의 동모자라는 죄명을 받고 끝내 구제되지 못했다.180)
이산겸은 충청도 보령사람으로 李之菡의 庶子이다.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趙憲 휘하에서 종사하다가 조헌이 錦山싸움에서 패사하자 흩어지는 병졸들을 수습하여 평택·진위 등지에서 建義大將 沈守慶의 절제를 받으면서 활약했다. 그는 여러 지역으로 의병을 이끌고 다녔으나 그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던 것 같으며 한때 의병을 해체하고 본가로 돌아간 적도 있었으나 반적에게 속아서 빠져들어 잡혀 올 때는 소수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도에 있을 때였다. 이산겸이 적괴라는 말은 송유진과 그의 일당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이산겸이 그와 같은 혐의로 구속되자 그 영향이 중앙정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예로 부수찬 鄭曄은 군졸과 군량미를 수집하러 지방에 있을 때 의병장 이산겸을 도와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지장을 받게 되었고, 申鵠과 申起一 등은 이산겸의 장인·처남 사이가 되어 추국에 말려들게 되었다. 이산겸이 반란에 가담했는지의 여부는 확실한 증거를 가리기 어렵지만 본인이 적괴라는 사실을 끝까지 부인했고, 송유진 일당을 잡아들이게끔 한 홍응기·홍각 등도 이산겸과 대질한 결과 그 사실을 부인한 점 등으로 미루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듯싶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반란의 성격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한편 송유진 일당 체포에 따른 포상관계를 살펴보면, 김응룡에게 除職하고 이에 동조한 홍응기·洪蘭生·申癸丑·洪璨·金應秋 등에게 賞職을 내렸으면, 捕告人 홍각에게는 포상과 아울러 折衝을 加資했다. 그 밖에 충청병사 변양걸이 반적 체포의 공이 크다 하여 가자하고 추국 諸臣들에게는 공에 따라 각각 포상했다. 그런데 홍각은 동년 12월에 다시 송유진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削奪官職되고 노비·전택이 모두 몰수되었으며 추국을 받다가 杖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