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회제도의 개혁
제2차 개혁 기간 중에 박영효를 비롯한 집권자들은<홍범 14조>,<내무아문훈시>,<各 大臣間 規約條件> 등의 형식을 통하여 사회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때의 개혁조치는 앞서 군국기무처가 추진한 것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우선, 개혁관료들은 양반의 계급적 차대 내지 양반제도 자체의 혁파보다 반상·귀천을 초월한 능력본위의 인재등용을 거듭 강조하였다. 이 점은 고종이 종묘와 사직에서 서고한<홍범 14조>의 제14조에 “사람을 쓰되 문벌에 구애받지 말고 선비를 구하되 두루 조야에 미쳐 인재등용의 길을 넓힌다”고 천명되었으며, 나아가 1895년 2월 23일에도 “人을 用하매 文地를 拘치 아니하고 士를 求하매 朝野에 遍及하는 士로 朕이 廟·社에 旣 誓告한지라. 그 德行·才藝·賢能·方正한 士가 有하거든 在한 바의 地方官이 身으로 勸하여 爲하여 駕하게 하야써 朕意에 稱케 하라”는 내용의 ‘詔勅 第一’에서 반복 강조되었던 것이다.509) 그리고 1895년 4월 4일에 박영효가 발포한<내무아문훈시>제65조에도 “該 邑內의 才德 聰俊 藝能이 有한 자를 즉시 薦報할 사”라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아울러 박영효는<내무아문훈시>제1조의 “民을 臨하는 도는 心을 用하믈 공평히 하야 貴賤과 親疎로써 毫末이라도 差別이 有케 아니할 사”와 제6조의 “대소민이 官庭에 跪하고 立하는 節과 민이라 칭하고 소인이라 칭하는 예를 일체 自便케 하고 늑행치 말을 사”를 통해 官尊民卑의 폐습을 타파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각 대신간 규약조건>에서는 “총리대신과 각 대신간에 존비의 구별을 설치 아니하고 상대하는 언사는 一樣케 함이 가할 사”(26조)와 “관리피차의 교제는 品階신분 등에 유하여 심히 존비를 구별하는 폐습을 두절할 사”(44조)라 하여, 文尊武卑 내지 관리 상호간의 존비 차별을 없애려는 조치를 취하였다.
다음으로, 노비를 비롯한 천민을 해방시키려는 개혁이 계속 추진되었다. 박영효는 “自今 僧徒의 入城하는 舊禁을 弛함”이라는 奏本을 올려 조선조에 접어들어 천민시되어 숙종대 이래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던 불교 승도들의 입성을 허락하였다.510) 반면 그는<내무아문훈시>제44조의 “巫女와 淆難한 類를 一切 禁斷할 사”에서 무당들의 종교행위를 엄단함으로써 천민해방문제를 다룸에 있어 형평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박영효는 공사노비의 혁파에 대해서<내무아문훈시> 제7조의 “官長이 胥隷에게와 主人이 雇傭에게 專히 强暴로써 待치 勿할 사”와 제24조의 “班家奴隷의 行悖함을 一切 嚴斷할 사”, 제52조의 “奴戶를 主戶에 付치 勿하고 分戶하여 應役할 사”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아울러<각 대신간 규약조건>에서는 “各 大臣 이하는 節儉을 守하믈 위하야 其 自家에서 使役하는 奴婢 등을 減省하믈 務하고 且 此等을 사역하기에도 各 其道로써 하야 일반 인민에게 美例를 示할 사”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영효는 공사노비의 혁파를 추진함에 있어 혁명적이라기 보다는 인도주의적·점진주의적·개량주의적 입장을 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개화파관료들 가운데 奴主가 많이 있어 천민층 해방문제에 냉담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종국적으로 취한 노주 중심의 노비문제 처리방침은 결국 천민층의 신분적 해방을 무한정 보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이는 양반 내지 아류 양반이었던 개화파관료들이 노비 및 여타 천민의 해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한계점이었다.
한편<각 대신간 규약조건>에서는 “관리피차의 교제는 품계신분 등에 유하야 심히 존비를 구별하는 폐습을 두절할 사”라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는 칙임관이 된 서얼·중인출신 개화파출신들이 대신회의 등 정부기구에서 활동할 때 다른 양반출신 관료들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받고자 하는 동기에서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女性의 대우를 향상시키고 혼인풍습을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안이 지속적으로 입안·공포되었다.<내무아문훈시>에 의하면, 제12조의 “窮困한 鰥寡孤獨과 身體不具한 民을 구호하는 법을 設할 사”와 제16조의 “寡女를 위협하야 개가함을 금할 사”라 하여, 과부에 대해 인도주의적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제20조의 “幼年의 嫁娶함을 禁하되 機務處 議案을 依하야 남20세 여16세에 許婚할 사”는 이미 군국기무처에서 가결했던 조혼 금지를 재차 강조한 것이었다.
아울러 박영효는 제14조의 “남녀가 毒을 飮하야 命을 害하며 신체를 훼손함과 다못 婦女가 독을 음하야 墮胎함을 금할 사”와 제17조의 “淫罪에 범한 女를 官婢에 沒役치 말을 사”, 그리고 제18조의 “破瓜之年이 미만한 女는 妓案에 入하지 말을 사”와 제82조의 “불효와 不悌와 淫姦의 죄명을 洞報가 有치 아니하거든 거론치 말을 사” 등을 통해 기생제도 내지 성생활에 유관한 개혁조치를 취했다. 또한 제19조의 “家夫가 妻에게 專히 强暴함을 금단할 사”는 가정생활에서의 남존여비 풍습에 기인한 악폐를 금하려 한 것이었다.
요컨대, 개화파관료들은 유교에 입각한 가부장적 남성우위사상을 탈피하여 비교적 평등주의적인 근대적 가정질서의 구축을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축첩제의 폐지를 논외로 하였고, 기생제도의 존속을 묵인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여성의 지위향상을 다룬 그들의 개혁안들은 모두 남성관료들의 시혜적 배려에서 발안·제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