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회제도
갑오경장 기간에 추진된 사회제도 개혁은 반상·귀천에 따른 차대 철폐, 노비 등 천민층의 점진적 해방, 서얼의 후사권 획득과 기술직 중인들의 환로 확장, 그리고 여성의 대우 향상과 혼인풍습의 개선 등이었다. 이로써 양반중심의 전통적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능력본위 인재등용과 평등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질서의 수립 기반이 마련되었다.
갑오경장 때 발포된 사회개혁안 가운데 일부는 즉시 효력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연좌율의 폐지에 따라 정치범의 蕩滌敍用이 이뤄졌고, 노비 혹은 官妓로 전락되었던 여자들이 면천되었다.656) 뿐만 아니라 노비를 위시한 일부 천민과 평민들은 집단적으로 과거 자기들의 상전이었던 ‘악질’양반들에게 보복적 懲治운동을 펴기도 했다. 이러한 해방된 천민과 평민들의 하극상운동은 프랑스혁명 당시 평민들의 귀족에 대한 유혈적 폭동에 비견되기도 하였다.657) 심지어는 “경무청의 순검이 대담하게도 王族懿親인 李埈鎔의 邸內에 침범하여 그를 잡아”가는 일들도 벌어졌다.658) 한마디로, 갑오경장 때 신분해방 개혁안 발포에 뒤이어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종래의 지배계층을 상대한 평민과 천민들의 ‘혁명적’ 응징운동 내지 하극상운동이 폭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하극상현상은 아관파천 이후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갑오경장 때 채택된 대부분의 사회제도 개혁안은 대한제국기에도 폐지된 일이 없이 법적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1896년 이후에도 많은 노비와 천민들이 이들 개혁법안을 근거로 삼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의 신분해방을 추구하였다. 특히, 1898년 11월 29일 독립협회가 마련한 官民共同會에서 서울의 白丁출신 朴成春이 행한 아래와 같은 연설은 주목할 만하다.
나는 大韓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利國便民의 길인즉 官民이 合心한 연후에야 可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遮日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심히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합심하여 우리 大皇帝의 盛德에 보답하고 國朝로 하여금 만만세를 누리게 합시다(鄭 喬,≪大韓季年史≫上, 282쪽).
백정으로서 이러한 대담한 발언이 가능하였던 것은 아관파천 이후 정부 내에 정동파 개혁관료가 일부 잔류해 있었고, 또 독립협회가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 고종황제에게 갑오경장 때 발포된 개혁 章程들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659) 보다 근본적으로는 백정들 자신이 갑오경장의 개혁정신을 최대한 살려 자신들의 인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갑오경장 때 채택된 사회제도 개혁조치는 1896년 이후에 백정을 비롯한 천민층의 신분해방운동에서 소중한 정신적·법적 근거로서 활용되고 있었다.
갑오경장 때 추진된 일련의 사회제도안은 양반제·노비제 등을 포함한 ‘봉건적’ 신분제도를 철저히 타파하기보다는 점진적·개량적인 방법으로 개혁하려 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혁안들은 그후 폐지되지 않은 채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신음하던 다수의 억울한 ‘피압박’ 계층 내지 개인들을 신분적 질곡 내지 악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법적 효능을 다하였던 것이다.660)
656) | Geo. Herber Jones, “The Status of Woman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 Vol.Ⅲ(January∼December, 1896), pp.129∼135;Homer B. Hulbert, “The Status of Woman”, The Korea Review, Vol.Ⅰ, No. 1·12;Vol.Ⅱ, No. 1∼4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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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7) | ≪尹致昊日記≫4, 41쪽. |
658) | ≪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13, 451쪽. |
659) | 愼鏞廈,≪獨立協會硏究≫(일조각, 1976), 388쪽. |
660) | 柳永益, 앞의 책, 169∼17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