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평등사회론
독립협회는 사회면에 있어서 차별적인 양반사회체제를 평등한 시민사회체제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문호개방 이후, 조선사회에는 열강의 침탈에 의하여 전통체제가 흔들리고 근대사상이 전래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정부는 14개조의 개혁정강에서, 문벌의 폐지와 인민평등권의 확립을 규정하여 평등사회를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조선 후기이래 민란의 연속선상에 선 동학농민군은 12개조의 폐정개혁안에서 노비문서의 소각, 신분제도의 타파, 토지의 평균분작 등을 내세우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갑오개혁의 추진자들은 양반·평민계급의 타파, 백정·광대 등 일체 천민신분의 폐지, 공사노비제도의 혁파, 인신매매의 금지 등 봉건적인 요소를 제도적으로 타파하여 근대적 평등사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립협회의 평등사회 지향의 논리가 전개되었다.
첫째로 독립협회는 신분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당시 신분차별의 문제는 班常制度와 노비제도였다. 이 두 가지 제도는 이미 갑오개혁 때에 폐지되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잔존해 있었다. 따라서 독립협회 회원들은 이미 칙령으로 없애버린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현실적으로 폐지하고, “창자 속에 양반만 들어앉아 명분만 좋아하는” 이른바 양반 근성을 송두리째 뽑아버릴 것을 역설하였다.0783) 그들은 “사람이 사람을 사고 팔고 할 권리가 없는 것은 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하나님께서 받은 사람의 권리는 같은 까닭이다”0784)라고 하여, 천부인권설에 의거해서 인신매매와 노예제도의 근절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법률이란 상하·귀천·빈부와 세력의 유무를 불문하고 공평해야 한다0785)고 하여 누구나 법률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법률 적용의 평등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신분차별 없는 평등사회의 추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로 독립협회는 기회의 균등을 주장하였다. 일찍이 실학자들은 지방의 면 단위까지 학교를 세워 8세의 아동을 신분의 차등없이 균등하게 교육을 시키고, 능력에 따라 순차적으로 상급학교에 진학시켜, 그 중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여 관리로 등용하는 公擧制度의 실시를 주장하였다.0786) 이러한 교육과 관직의 기회균등 의식은 개화인사들에게 계승되었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신분제도의 폐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전국 인민이 신분차별 없이 實狀학문을 배우도록 하여 필요한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주장했으며, 양반·상민의 차별없이 실력과 능력에 따라 공직을 분담해야 한다는 공무담당의 균등을 주장하였다.0787) 이것은 기회균등의 평등사회의 추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로 독립협회는 지역의 평등화를 주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인간차별뿐만 아니라, 지역차별이 심하여 서북지방과 개성·강화도 사람들은 억압당하고 정계의 진출이 막혔는데, 대원군은 지역차별을 두지 않고 서북인과 개성인까지 등용하여 인재를 썼다.0788) 독립협회 당시에도 중앙과 지방의 차별이 심했고 특히 서북지방에 대한 차별은 대표적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에서 “서울 백성만을 위할 게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代言하여 주려함”0789)이라 하여 지역차별의 철폐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 회원들은 “정부에 들어오는 돈인즉 모두 시골 백성에게서 오는 것이로되 그 돈 쓰기는 서울 백성만 위하여 쓰는 모양”이라고 하여, 정부의 서울중심 시책을 비판하고, 서울과 지방에 있어서 세금과 시설과 치안의 공평 등 지역의 평등화를 주장하였다.0790) 이것은 지역차별 없는 평등사회의 추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넷째로 독립협회는 남녀평등을 주장하였다. 갑신정변의 주도자 박영효는 국왕에 보낸 상소문에서 남녀 부부의 권리균등과 남자의 취첩 금지를 건의하였다.0791) 갑오개혁 추진자들은 남녀 조혼의 금지, 과부 재혼의 허용, 남편의 아내에 대한 강폭 금단 등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법안을 만들었다.0792) 이러한 맥락에서 독립협회 회원들은 여성의 지위 특히 남자의 부속 상태에 있는 부인의 지위는 남성의 억압과 여성의 무교육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하고, 종래의 취첩을 인정하는 결혼제도의 비윤리성을 통렬히 비판하며 여권운동을 고무하였다.0793) 이에 고무되어 창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인 贊襄會는 여성 스스로 남녀평등을 선언하고, 여권의 신장 및 대한의 문명국화와 타국과의 평등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여성들의 사회운동에의 참여를 밝혔다.0794) 찬양회는 남녀평등의 실현을 위해 여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가 주도하는 민권운동에도 참여하였다.0795) 이것은 남녀차별 없는 평등사회의 추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본래 평등의 원칙은 서구에서는 자유주의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서 “특권계급의 철폐와 시민계급의 평등한 참정권과 법률 적용의 평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 시민계급의 해방을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0796) 독립협회 회원들은 이러한 서구의 평등사상을 수용하여 반상제도와 남존여비, 빈부귀천의 차별 등 전통적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천부의 인간의 권리가 보장되는 평등사회를 구현코자 하였다. 이것은 신분 본위의 전통적 특권사회를 능력 본위의 근대적 평등사회로 전환시키려는 변혁논리였다.
0783) | ≪독립신문≫, 1896년 6월 18일, 논설 및 1898년 3월 31일,<독립협회 회원 의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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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4) | ≪독립신문≫, 1897년 10월 16일, 논설. |
0785) | ≪독립신문≫, 1896년 7월 11일, 논설. |
0786) | 金龍德,<重商論과 技術學의 導入論>(≪한국사≫14, 국사편찬위원회, 1975), 268쪽. |
0787) | ≪독립신문≫, 1896년 12월 22일, 논설 및 The Independent, December 22, 1896, The Editorial 및 November 19, 1898, Editorial 참조. |
0788) | 李瑄根,<大阮君의 政治>(≪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60쪽. |
0789) | ≪독립신문≫, 1897년 4월 7일, 논설. |
0790) | ≪독립신문≫, 1896년 6월 9일, 논설. |
0791) | <朴泳孝 上疏文>중 使民得當分之自由以養元氣條 참조. |
0792) | 柳永益, 앞의 글, 280∼281쪽 참조. |
0793) | ≪독립신문≫, 1896년 4월 21일, 논설 및 6월 6·16일, 논설. |
0794) | ≪독립신문≫, 1898년 9월 9일, 잡보 및 10월 13일,<부인상소>. |
0795) | ≪독립신문≫, 1898년 9월 9·13·15·26·27·28일 및 10월 7·8·13·29일 기사. |
0796) | 文鴻柱, 앞의 책, 17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