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내의 서양인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서양인들은 조선 총독부의 회유 대상이었다. 1919년의 3·1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교회와 신도·선교사들이 피해를 입었고, 이들이 자신들이 목격한 조선의 참상을 본국에 알렸기 때문에, 서구 열강의 여론은 일본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 서구 열강의 협조를 필요로 했던 일본으로서는 선교사를 회유하여 이러한 상황을 타개해 나가야만 했다. 이를 위하여 조선 총독부는 선교를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고, 미션계 사립 학교의 성서 교육을 공인하여 외국인 선교사들의 호감을 얻었으며, 종교 단체가 소유한 부동산을 내국 법인으로 허가함으로써 재정적으로도 뒷받침해 주었다. 이러한 우대 조치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 통치하는 '제국'이면서도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에 인종 차별을 당하기도 하는 후발국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서구 열강도 일본의 우대 조치를 대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선교사들에게 조선의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도록 조치하면서 조선에서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총독부와의 교류
베네딕트 수도원
- 수도원장 사우어(Bonifacius Sauer) 베네딕트 수도회 주교
- 사이토 총독의 수도원 방문
-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 대리와 유아사 구라헤이(湯浅倉平) 정무 총감의 수도원 방문(1927)
- 베네딕트 수도원 수도회 전체
- 형제회(the convent of brothers)
- 덕원의 새 베네딕트 수도원
- 덕원의 새 베네딕트 수도원
- 수도원 인근의 농가
- 새 수도원 소유지의 풍경
- 신학교와 수도원 전경
- 겨울 아침 덕원의 베네딕트 수도원
- 임시 예배당(provisional chapel)
- 수도원 복도
- 사우어(Sauer)의 집무실
- 덕원의 새 가톨릭 신학교
- 신학교 학생과 교수들
- 일본인들 속의 에카르트(Eckardt) 신부
- 한국 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는 신학교 교장
- 원산 수녀원
- 원산의 베네딕트 수녀회
- (위) 주교 거주지 (아래) 해성 보통 학교/ 가톨릭 초등 학교
- 1,100명의 신도를 보유한 원산의 가톨릭 교회
- 원산의 주교 거주지
- 한국인 여성과 아이들의 교리 학습
- 원산 가톨릭 초등 학교의 가을 운동회
- 약 200명의 신도를 보유한 청진의 가톨릭 예배당
- 3,400명의 신도를 보유한 간도 학교와 선교 예배당
- 300명의 신도를 보유한 회령의 선교 예배당
- 간도 팔도구의 가톨릭 초등 학교
- 100명의 신도와 학교를 보유한 간도의 가톨릭 선교 예배당
- 800명의 신도와 학교를 보유한 간도의 가톨릭 선교 예배당
- 강에서 배를 타는 성직자들
- 베네딕트 선교회의 학교(1)
- 베네딕트 선교회의 학교(2)
- 4,700명의 신도와 학교를 보유한 간도 팔도구의 가톨릭 선교 예배당
- 학교 광경
- 베네딕트 수도원의 목공소
- 수도원의 작업장
- 어린 소년·소녀들을 가르치는 베네딕트 수녀
- 경성 제국 대학에서 에카르트(Andreas Eckardt) 베네딕트 수도회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