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애국단
임시 정부는 1931년 말, 침체된 독립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해 의열 투쟁을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채택하였다. 구체적인 실행에 관한 모든 권한은 김구에게 일임하였고,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였다. 한인 애국단의 활동은 일본과 국내, 그리고 중국 각지에서 일제의 침략 전선을 따라 이루어졌다. 한인 애국단의 활동은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켜 임시 정부의 활로를 열어 주었다.
- 태극기 앞에 선 이봉창(1931. 12. 13)
-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을 들고 서 있는 이봉창(1931. 12. 13)
- 이봉창의 한인 애국단 선서문(1931. 12. 13)
- 이봉창(1931. 12. 17)
- 경시청에 연행되어 조사실로 가는 이봉창(1932. 1. 8)
- 일본 동경 경시청 앞에서 의거 현장을 검증하는 일본 경찰(1932. 1. 8)
- 동경 일일 신문 호외(1932. 1. 8)
- 동경 조일 신문 호외(1932. 1. 8)
- 한국 독립당 선언 '대 이봉창 저격 일황 사건'(1932. 1. 10). 한국 독립당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민의 투쟁이 계속될 것임을 선언하였다.
- 재판정으로 호송되는 이봉창(1932. 9. 30)
- 한인 애국 단원 유상근
- 한인 애국 단원 최흥식
- 한인 애국단 단장 김구와 단원들(1932). 왼쪽: 최흥식·김구·유상근
- 윤봉길 선서문(1932. 4. 26)
-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과 권총을 쥐고 있는 윤봉길(1932. 4. 26)
- 한인 애국단 단장 김구와 단원 윤봉길(1932. 4. 26)
- 윤봉길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글(1932. 4. 27)
- 윤봉길이 의거 전, 김구와 헤어지면서 자신의 좋은 시계와 바꾸자고 했던 김구의 시계
- 윤봉길이 제안하여 김구와 바꾼 윤봉길의 시계
- 윤봉길 의거 전에 열병하는 일본군(1932. 4. 29)
- 의거 직전의 기념 식장(1932. 4. 29)
-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한 직후의 기념 식장(1932. 4. 29)
-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한 직후의 기념 식장(1932. 4. 29)
- 윤봉길이 미처 던지지 못한 도시락 폭탄(1932. 4. 29)
- 의거 직후 연행되는 윤봉길
- 1932년 4월 29일자 동경 일일 신문 호외
- 1932년 5월 1일자 대판 조일 신문 호외 2면
- 1932년 5월 1일자 동경 일일 신문 호외 2면
- 1932년 5월 1일자 동경 조일 신문 호외 1면
- 1932년 5월 14일자 차이나 위크 리뷰
- 일본 상해 파견군 헌병 사령부에 압송되어 신문 받을 당시의 윤봉길
- 윤봉길 순국 장면(1932. 4. 29)
- 윤봉길 순국 장면(1932. 4. 29)
- 윤봉길 의거 후 중국인들에게 한인 애국단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 중문으로 발간한 ≪도왜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