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배후로 둔 한반도의 중앙 항구로서 그 상업적·군사적 가치가 높았다. 일본 역시 이에 주목하여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였고, 인천은 1883년에 한반도에서 세 번째로 외국에 개항되었다.
인천항은 러일 전쟁으로 절정의 호황을 맞았던 이래 침체를 겪었다.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대형 선박의 접안이 어려웠고, 항구와 철도(경인선)의 연결도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 총독부는 1911년부터 축항 공사를 시작하여 1918년에 2중 갑문식 선거(제1선거)를 준공하였다. 이로써 조수 간만의 차에도 불구하고 4,500톤급 선박 3척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만철이 조선 국유 철도를 위임 경영하면서 철도 정책도 변했다. 그 결과 1906년에 1,500만 원대였던 무역액이 선거 준공 후에는 1억 2,600만 원을 돌파하기도 하였다. 급증한 무역액의 태반은 역시 쌀로 인한 것으로, 인천이 전 조선의 패권을 장악했다고까지 평가되었다. 이에 따라 인천항에는 미두 거래소, 미곡 검사소, 곡물 협회 등 각종 시설이 완비되었고, 정미업·창고업 등의 관련 산업들도 발달하였다. 인천항은 말 그대로 ’쌀의 인천’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