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동력식 기계의 설치
청국에 파견된 유학생들이 귀국할 때 구입한 기기가 수동식 小手기계였으나, 조선정부는 연차적으로 동력식 무기 생산설비를 갖추기 위하여 나중에는 동력식 기계를 도입하였다. 1882년 영선사 김윤식이 구입해온 기기 이외에, 1883년에는 청국에서 대신 구입해 준 동모제조기·소총수리기계 등이 운송되어 왔으며, 1885년에는 탄환과 銅冒제조기를 구입하였다. 또한, 기기창에서 사용할 12마력의 증기기관은 기기창 완공일까지는 도입되었다. 그리고 1889년에 비로소 12마력 증기기관·소총제조기계(3대)·드릴링머신·조포기·세포기 등이 도입되었다.537) 기기창은 당초의 목표인 무기 제작기술의 수용을 달성하지 못하고, 1894년 갑오개혁의 와중에서 문을 닫고 말았다.538)
537) | 당시 구입한 드릴링머신으로 총열의 구멍을 뚫고, 粗砲機로 뚫린 구멍을 거칠게 가공하고, 細砲機로 정밀하게 가공하면, 소총제작에서 가장 어려운 총열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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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8) | 기기창은 재정문제, 무기의 수입, 기반산업의 취약 등의 원인으로 중단되었을 것이다. 유학생파견부터 시작된 기기창의 설립은 처음부터 재정면에서 청국에의 의존도가 너무 컸다. 기기창 건물이 5년만에 완공된 것도 정부의 재정 악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정부는 무절제하게 외국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였다. 무기 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면 무기수입보다는 자체 기술의 개발에 역점을 두어야 했다. 그리고 무기를 수입하더라도 생산하려는 무기와 같은 종류를 수입하여 국내 기술로 생산할 수 있는 부품은 생산하고, 생산할 수 없는 부품은 수입해야 했다. 한편 소총을 제작하더라도 동철 제련기술, 기계 가공기술, 화약 제조기술 등의 기술이 종합적으로 발달해 있어야 한다(최규남, 앞의 글, 43∼4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