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1910년대 독립운동의 정비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대에 일제가 식민지 기반을 조성할 때 독립운동도 전열을 가다듬었다. 국내에서 혁명기지를 개척한 경우는 대한광복회와 조선국민회가 전국에 비밀기지를 건설하고 있었듯이, 중국의 신해혁명과 같은 민족혁명을 추진하고 있었다. 해외로 망명한 이는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나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처럼, 독립군을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육자와 종교인까지 민족 전열에 참가하면서 전민족적인 3·1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때 조선인의 행적을 보면, 대한제국의 회복을 갈망한 복벽주의 유학자들, 의병이나 계몽주의 좌파처럼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거나 국내에서 혁명기지를 개척한 보황주의 또는 공화주의 인물, 조선산직장려계를 만든 계몽주의 우파처럼 국내에서 개량주의에 머문 사람, 1918년까지 계속된 토지조사사업의 추이에 따라 토지분쟁에 골몰했던 다수 농민,<조선귀족령>이나 은사금을 받고 중추원이나 총독부 관리에 몸을 던져 친일 행각을 걸은 사람, 식민지적 재편에 따라 방황하는 많은 사람 등,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친일 행각외에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사람도 참가하여 3·1운동을 거족적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그때까지의 복벽주의나 보황주의를 극복하고 공화주의를 새롭게 발전시킨 것은 민족역량 증대에 크게 이바지한 역사적 혁신이었다.
3·1운동을 세계사적으로 보면 인도주의 혁명운동이었다. 정의·인도를 실현하기 위하여 세계를 개조하고 사회를 개조하자는 것이다. 개조의 논리로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민주주의·자본주의·공산주의 등의 사상논쟁이 일게 되었다. 아울러 세계와 사회를 개조하자니 제국주의를 철폐하고 약소민족은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민족해방운동이요 독립운동으로 전개된 3·1운동의 제1차적 성격이다.479) 레닌이나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논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세계사조를 이용하여 민족혁명으로 3·1운동을 일으켰는데 열국이 모두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여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였다. 국제사조의 총론과 각론이 다른 단면이기도 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그때까지 성장해 온 근대적 민족지성을 총합하고 새롭게 나아갈 민족지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립했다는 점에서 한국근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뜻깊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479) | 趙東杰,<3·1運動의 理念과 思想>(≪韓國民族主義의 성립과 獨立運動史硏究≫, 지식산업사, 1989), 39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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