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1920년대는 민족총력항쟁의 시기였다.
1920년대는 민족총력을 경주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독립전쟁이 전개되어 청산리전쟁을 비롯한 무수한 대소전쟁이 독립운동사를 장식하였다. 연해주에서는 때마침 볼쉐비키혁명의 진행중에 1921년 자유시(스바보드니)참변을 당하여 독립군은 모두 러시아 혁명군으로 개편되었다. 국내에서는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연락망인 연통부와 교통국을 비롯하여 수 많은 지하단체가 결성되어 저항하다가 해외로 이동하였고 한편, 청년운동·학생운동·여성운동·농민운동·노동운동·형평운동 등의 사회운동과 국어·국문학·국사 등의 국학운동과 함께 언론운동·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한계는 있었다고 해도 경제운동으로 전개된 협동조합운동과 물산장려운동, 그리고 문화운동의 종교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도 민족적 분위기를 제고시켰다. 자신의 조건과 능력에 따라 가능한 모든 방법과 노력을 경주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민족총력항쟁이었으므로 양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주목할만한 변화가 있었다. 1920년대에 각종 사상운동이 대두하여 1925년 조선공산당 출범을 전후하여 사상단체가 백화난만식으로 나타났는데 이어 국내외에서 꾸준히 추진된 민족유일당운동을 보거나, 그의 일단으로 추진된 1926년의 6·10만세운동을 보거나, 1927년에 신간회가 탄생한 것을 보거나,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이나 원산노동파업과 용천소작쟁의의 내용을 보거나, 총력항쟁이 질적으로 추진된 역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유일당운동이 성공하지 못한 한계도 있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이해할 때 먼저 식민조건과 대비하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이론을 세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임시정부를 이해할 때 그의 발생가치는 3·1운동에서 표현된 민족적 주권의지의 산물이므로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상해에서 중경까지 이동하며 싸워온 그의 역할가치는 사람마다 평가를 달리할 것이다. 그것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정상정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